녹음, 6월의 숲
녹음, 6월의 숲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6.07 19: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전쟁 같았던 시간이 지나고 6월이 왔다. 6월의 숲은 이제 호기심 많은 신록(新祿)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짙고 연한 잎들이 일제히 5월의 햇살을 반사하면서 성장하는 치열함은 우리에게 화사하고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꿈꿀 수 있게 했다.

사람들은 6월의 숲을 더 이상 신록(新祿)이라 부르지 않는다. 봄은 무심하게 지났고, 여름의 이름이 익숙한 계절의 숲을 우리는 녹음(陰)이라고 부른다.

`신록'은 `늦봄이나 초여름에 새로 나온 잎의 연한 초록빛'을 통칭한다. 겨우내 숨죽이며 생기를 잃었던 나뭇잎과 풀들이 쇠락의 기운을 떨쳐내고 땅속 깊은 곳으로부터 물을 끌어 올려 찾아내는 새롭고 연한 빛깔.

“신록에는 우리 사람의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 신록을 대하고 앉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낸다. 그리고 나의 마음의 모든 티끌―나의 모든 욕망과 굴욕과 고통과 곤란―이 하나하나 사라지는 다음 순간, 별과 바람과 하늘과 풀이 그의 기쁨과 노래를 가지고 나의 빈 머리에, 가슴에, 마음에 고이고이 들어앉는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배운 수필가 이양하의 `신록예찬'을 여태 기억하고 있다는 것으로 `신록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인생의 대견함이 어쩌다 허무한 것인가. 이팝나무 하얀 꽃은 어김없이 지고, 개망초와 금계국이 키재기에 여념없는 6월의 숲과 들은 여럿이 한꺼번에 짙은 녹음(陰). 이양하의 <신록예찬>은 또 이렇게 설파한다.

“사람이란―세속에 얽매여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주머니의 돈을 세고 지위를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거나, 또는 오욕칠정(五慾七情)에 사로잡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는데 마음의 영일(寧日)을 갖지 못하는 우리 사람이란 어떻게 비소(卑小)하고 어떻게 저속한 것인지 결국은 이 대자연의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조화를 깨뜨리는 한 오점(汚點) 또는 한 잡음(雜音)밖에 되어 보이지 아니하여 될 수 있으면 이러한 때를 타 잠깐 동안이나마 사람을 떠나 사람의 일을 잊고, 풀과 나무와 하늘과 바람과 한가지로 숨쉬고 느끼고 노래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다.”

`신록예찬'이 처음 발표된 때는 1947년. 겨우 해방을 맞고, 비로소 독립국가의 정부가 출범하는 시절에도 자본의 욕망에 대한, 그리고 사람 사이의 다툼의 심각함에 대한 경계가 사뭇 지엄하니, 인간이 자연에 미치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여전하거나 오히려 더 나빠지고 있다.

연하고 새로운 잎의 시작 단계인 신록을 지나 성장을 이룬 숲을 `녹음(陰)'은 푸르게 우거진 숲의 본래 모습과 더불어 짙은 만큼 함께 드리우는 `그늘'의 은근함으로 더 의미심장하다.

세상사 두루 그렇듯이 생명이 있는 모든 주체들은 성장(成長)하여 성장(盛裝)하기까지 전쟁 같은 치열함을 견뎌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대체로 잘 참아주며 양보하고 제각각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아끼고 보호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신록이 녹음이 되도록 잘 자라나 잘 차려입은 자태를 자랑하는 나무와 숲은 그렇게 성장(盛裝)한 만큼, 그렇게 짙고 넓은 늘을 드리우며 뜨거운 햇볕도 가려주고 편안하고 시원하게 쉴 틈을 기꺼이 내어주기도 한다.

녹음의 계절 6월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의 평화와 안전을 생각한다.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던 사람들과 그 싸움을 지켜보거나, 판단과 선택의 책임에서 고민하던 사람들 모두에게 당분간 표면적으로는 다투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일상이 그저 평화롭기만을 바란다.

녹음(陰)의 6월에 전쟁을, 항쟁을 기억하는 일 또한 비극이거나 떨쳐버릴 수 없는 숙명 같은 것. 숲에서 부는 바람을 망설이지 않는 6월을 살고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