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100년, 그리고 교육감 선거
어린이날 100년, 그리고 교육감 선거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5.31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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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5월의 마지막 날에 <수요단상>을 쓴다. 그리고 글은 6월의 첫날 수요일에 읽힌다.  밤 11시 59분 59초에서 찰나의 순간에 다른 얼굴로 나타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5월에 하지 못한 100년의 어린이날이 못내 아쉽다. 게다가 새로 시작되는 6월의 첫날이 지방선거일이고, 그 결과에 따라 양지와 음지의 구분이 뚜렷해질 터이니 단 하루 사이의 긴장은 여느 날하고는 크게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흔히 ‘교육의 수장’이라는 전근대적 언어로 통하는 교육감 선거가 처음부터 나는 마뜩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라는 대의명분으로 교육감도 선출직으로 뽑는 제도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당연히 주체의 핵심인 초·중·고학생들에게 판단과 선택의 권리와 의무를 주지 않는 것은 모순이라는 생각을 여태 지울 수 없다.
100년 전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날 선언문>을 통해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히 타일러 주시오.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 만한 놀이터와 기관 같은 것을 지어 주시오.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라고 ‘어른들’에게 당부했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른이 어린이를 보호하고 보살피며, 잘 자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베풀어야 한다는 ‘권유’는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적 책임이 있는 ‘어른들’이 ‘어린’ 학생들을 (교육적으로)잘 이끌 수 있는 인물을 판단하고 선택해 소위 ‘수장’을 뽑아주는 선거 주권의 구분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가.
미안하지만 대학입시와 학력에 따른 능력주의에 굴종하고 있는 한국적 교육 현실에서 이 같은 ‘어른들’의 논리는 무책임하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자기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갔으면 하는 기대와 희망을 버릴 수 없을 때까지만 교육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대학입시 관련 정보와 지식은 대입 수험생을 두고 있는 전업주부가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적확하게 꽤 뚫고 있다는 것은 오래된 정설이다. 
그러나 사투에 가까운 개인의 노력으로 힘겹게 얻어낸 정보와 지식은 절대로 공유되지 않고, 그 ‘때’만 넘기면 전혀 관심도 없다. 그러니 ‘어른’이니까 훌륭한 인물을 잘 뽑아 제발 백년지대계라는 교육을 성실하게 이끌어 주기를 바란다는 명분은 절대로 ‘참’이 될 수 없다. 오로지 ‘정치’를 통해 선택되는 ‘교육자치’의 허울은 그야말로 ‘교육적’ 명분을 위해 바로잡을 때가 되지 않았는가.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구분하고, 진영에 따라 단일화가 획책되는 편가르기는 절대로 ‘교육적’일 수 없다. 극한 대립을 통해 막말과 비난, 마타도어가 난무하는 어른들의 선거판을 보고 자란 어린 학생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이긴 자만 살아남는 극한의 경쟁뿐이다. 그러니 어른이니까 관심도 없는 책임의 선택이 참정권의 질서라는 말도 마땅하지 않다. 교육의 직접 당사자이자 핵심 주체인 학생들에게 선택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는 것을 어른의 논리로만 고집하는 것은 방관과 무관심을 키우는 독소가 될 것이다.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사람들이 모든 다른 단체나 개인에게 물리적인 강제력을 인정하는 것은 국가 자신이 그것을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만이라는 것, 즉 국가가 강제력에의 ‘권리’의 유일한 원천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이 현대의 특징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관계없는 ‘어른들’에 의해 선출된 교육감이 행사하는 ‘강제력’은 초·중·고학생과 학부모에게만 궁극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육감 선거만큼은 그들 당사자로 한정해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인기투표면 어떤가. 소파 방정환의 말처럼 ‘대우주 뇌신경의 말초’가 오로지 있는 ‘어린’ 학생들에게 선택에 따른 책임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교육’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리다고 무시하지 말라. 그들에게는 어른보다 더 차가운 피와 뜨거운 심장이 있다. 100년 전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어린이날>을 정해 실천하는 슬기를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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