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들판
초여름 들판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2.05.30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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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봄이 지나면 여름이다.

봄에 탐닉하는 경우라면 여름은 무성하기는 하지만 봄 같은 화사함은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름은 결코 단조롭거나 화사하지 않은 게 아니다.

조선(朝鮮)의 시인 이언적(李彦迪)의 시선을 따라가면 이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초여름 들판(初夏野興)

野水潺潺流不盡(야수잔잔유부진) 들판 물이 졸졸졸 끊임없이 흐르고
幽禽款曲向人啼(유금관곡향인제) 숨은 새는 다정하게 나를 향해 울음 우네
閑吟閑步仍閑坐(한음한보잉한좌) 한가로이 읊으며 걷다가 앉아 쉬는데
十里江郊日欲斜(십리강교일욕사) 십리나 되는 강둑으로 해가 기우네


여름 들판에 나선 시인을 맨 먼저 맞은 것은 물이었다.

봄에도 물은 흘렀을 테지만, 그 흐름은 인상적이지 않았다.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확연히 다른 모습이 되었다.

수량이 풍부해 지면서 물의 흐름은 한결 늠름해졌고, 흐르는 소리 또한 우렁차졌다. 졸졸 보다는 콸콸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어쨌든 여름 들판의 물 흐르는 소리가 맨 먼저 시인의 감흥을 자아냈다.

다음으로 시인의 감흥을 부른 것은 새 소리이다.

숲이 우거져 그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그래서 듣는 묘미가 배가된다.

시인은 새를 보지 못하지만, 새는 분명히 시인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시인을 향해 다정한 노래를 부르는 것 아니겠는가?

물소리와 새 소리를 환영 팡파르 삼아, 시인은 들판을 서성인다.

노래를 읊조리다가 걷다가 앉았다가 그야말로 유유자적이다.

이러한 시인의 모습을 시종일관 관통하는 것은 한가로움이다.

읊는 것도 걷는 것도 앉는 것도 다 한가로움을 바탕에 깔고 있다.

한가로움으로 충만해진 시인의 눈에는 강이며 들판이며 지는 해마저도 한가로움 그 자체이다.

봄이 시작의 역동성을 갖고 있다면, 여름은 상대적으로 멈춘 듯한 느낌을 준다. 일정 고도에 오른 비행기의 느낌 같은 것이다.

그래서 요동치는 감정이 봄이라면, 여름은 한가로운 감흥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살이에 지치고 머리가 복잡할 때, 싱싱하고 성숙한 물소리 새 소리가 맞이해 주는 들판에 나서 보는 게 좋다.

멈춘 듯한 여름의 품에서 한가로움을 실컷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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