梧里(오리)와 夏亭(하정)
梧里(오리)와 夏亭(하정)
  • 이재경 기자
  • 승인 2022.05.30 19: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데스크의 주장
이재경 국장(천안주재)
이재경 국장(천안주재)

 

書與孫守約赴延豊縣(서여손수약부연풍현).

조선 중기 명재상이던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은 연풍현감(충북 괴산군 연풍면)으로 부임하는 손자 수약에게 봉직할 때 지켜야 할 아홉가지 지침을 글로 써서 내려준다. 그의 나이 81세. 영의정을 다섯 차례나 지내고 낙향하여 오리곡(경기 광명시 소하동)에서 말년을 보낼 때다.

이 글에는 공직자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백성들을 대해야 하는지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중 두번 째와 여덟번 째의 지침에는 애틋한 위민 정신이 드러나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몸을 닦는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백성은 마땅히 어루만지고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오리는 평안도 관찰사로 재임 중 부역을 줄이고 세금을 감면하는 등 폐단을 줄여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고, 안주목사로 재임 때는 관리들의 비리를 차단하고 직접 집집마다 공평하게 양곡을 배분했다. 150년 후에 활동한 정약용에 앞서 이미 백성을 받드는 `목민(牧民)'을 실천했던 셈이다.

하정(夏亭) 류관(柳寬,1346~1433)도 오리 못지 않은 위민선정으로 칭송을 받은 인물이다. 조선 건국에 참여해 세종 때 우의정까지 지낸 하정은 동료 벼슬아치들에게 눈총을 많이 받았다.

청렴을 가훈으로 삼을 정도로 꼿꼿하고 강직했던 그는 궁궐에서 잔치를 벌이고 술을 마시는 것을 금하고 허례허식을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궁궐에 출퇴근을 하면서 수레나 말을 쓰지 않고 지팡이를 짚고 직접 걸어서 다녔으며 퇴근 후엔 초가집 한 칸 집에서 베옷과 짚신으로 생활을 했을 정도였다.

손수 농사를 짓는 정승으로도 유명했다. 궁궐에서 머지않은 종로에 집이 있었는데 퇴청을 하거나 쉬는 날이면 호미를 들고 채소밭에서 김매는 모습을 이웃들이 지켜봤다.

세종이 그가 궁핍하고 청렴하게 산다는 얘기를 듣고 벼슬 자리에 있는 동안에도 자주 음식과 물건을 보내 그를 치하했다. 하지만 임금이 보낸 음식과 재물은 그의 집에서 하루를 남아있지 않았다.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무엇이나 늘 나눠줬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들은 세종은 더 자주 하사품을 보냈다.

우기에 하천이 넘치자 자신의 녹봉으로 마을에 다리를 놓아주고 붓과 먹, 벼루를 사서 아이들에게 나눠 공부를 하도록 했다. 죽기 전에 이런 이런 유훈을 남겼다.

吾家長物惟淸白 世世相傳無限人(내가 남길 것은 오직 `청백' 뿐이니, 대대로 이어 끝없이 전하라).

6.1 지방선거일이 하루 남았다. 전국에서 17명의 광역단체장과 226명의 기초단체장 등 4132석의 자리를 놓고 7574명의 후보자가 경쟁하고 있다.

후보자 중엔 자격이 없는 파렴치범들도 있다. 폭력과 상해 전과가 500명이 넘고 음주 운전 전과자가 947명이다. 성추행 전과자도 있다. 유권자의 공천이 아닌 정당 공천의 폐해다.

후보자들의 기부 전력도 거의 전무하다.

중앙에서 고위 공직자로 수십년간 지내면서 고향 경로당에 연탄 단 100장도 기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갑자기 지방에 내려와 시장, 군수를 하겠다며 표를 구걸하고 다닌다. 위민 정신으로 나온 건지 벼슬아치를 더 해보려고 나온 건지. 지방의회 출마자 중엔 기부는커녕 남의 돈을 가로채 사기 전과로 실형을 받은 인물도 있다.

유권자들이 제대로 심판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