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까지' 불행하지는 않았다
`그렇게까지' 불행하지는 않았다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승인 2022.05.29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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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살아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을 만난 적은 없다. 친구를 만나든 공적인 관계 맺음이든 할 얘기 다 하고, 할 일을 다 하면 당연히 그래야 하듯이 언젠지 모를 허망한 약속을 하고 헤어진다.

어떤 이를 만나도 먼저 말을 걸고 안부를 묻는 편이다. 내가 먼저 말을 거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침묵이 싫어서다. 특히 사무적인 관계로 만날 때는 나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말한다. 훈련된 조교처럼 상대방에게도 요구하듯이 지나치게 웃으며 말한다.

웃음의 페르소나,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가면을 선택해 쓰고 나오는 일도 만만찮다. 친절한 가면, 평화스러워 보이는 가면, 해명에 필요한 가면, 무표정의 가면 등 가까운 사람을 만날 때도 가면이 필요할 때가 있다. 괜한 슬픔을 감추고 싶으니까.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읽고 나서 주인공 마르슬랭이 부러웠다. 그는 이미 어릴 적,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같이 있는 것만으로 충만한 친구가 있었다. 이런 친구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마르슬랭은 얼굴이 빨간 아이다. 아무 이유 없이 빨개지는 얼굴, 가끔 빨갛지 않은 순간도 있지만 대체로 빨간 얼굴로 다닌다. 왜 얼굴이 빨개지는 건지 늘 궁금하지만 유명한 심리학자나 의사도 마르슬랭의 병을 고치지 못한다. 아이들이 자기 얼굴 색깔에 대해 한마디씩 하는 것이 점점 견디기 괴로웠기에 외톨이가 되어갔다. 혼자 노는 게 훨씬 좋다고 스스로 말한다. (내가 주로 하는 말 아닌가!)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 자꾸만 재채기를 하는 아이 르네 라토를 만난다. 공통점이 생긴 두 아이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얼굴이 빨개서, 아무 때나 재채기를 해서 인생이 얼마나 어려운지 털어놓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다. 얼마나 친해졌는지 이제는 어디를 가든 두 꼬마는 서로를 먼저 찾는다. 그렇게 신나는 날들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가슴속에 `그렇게까지' 불행하지는 않았다는 고백도 생겨난다. 하지만 이 절친은 르네의 이사로, 새 주소와 전화번호를 받아놓은 쪽지를 부모님이 잃어버리는 바람에 어른이 될 때까지 만나지 못한다.

르네를 그리워하던 마르슬랭은 시간이 지나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그 친구들도 각자 남과 다른 특별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어른이 된 어느 날, 도시 한복판 어디선가 들리는 재채기 소리에 르네임을 확신한다. 어른이 되어도 얼굴은 빨갰고 재채기도 여전한 두 사람. 극적으로 만난 두 사람은 예전처럼 어딜 가든지 서로를 먼저 찾는 사이가 된다. 다시 만난 그들.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오래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있었다.

진심으로 이해를 주고받는 친구를 만난다면 내 모든 생의 어리숙함과 미련함이 `그렇게까지' 불행하지는 않을 거란 막연한 상상을 해본다.

카피라이터 정철은 <사람사전>에서 불행이란 `견딜 수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 사람이 견뎌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게 하는 힘은 친구다. 친구의 단점을 자신도 갖고 있어 그 아픔을 매우 깊이 이해하는 사이.

문득 사귐에 있어 내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재채기 같은 단점을 친한 사이에도 감추려고만 한 내가 보인다. 가까이 왔다가 멀어져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깊은 우정을 나눌 새도 없이 시간이 지나면 명절에 안부만 묻는 사이가 된 사람들. 아직 늦지 않았다면 나의 빨간 얼굴을 그대로 받아주는 친구를 찾고 싶다. 아마 가까운 곳에 있으리라. 더 불행해질 수 있는 나를 건져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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