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을 읽는 날 - 둘째 날
풀을 읽는 날 - 둘째 날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2.05.24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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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엄지와 검지 끝에 온 힘을 모아 흙 속으로 밀어 넣는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풀인데 행여 달아날까? 순간에 몰입한다. 하필 꺾꽂이한 지 얼마 안 된 수국 옆에 뿌리를 내렸을까? 얼마 전까지도 보이지 않았는데 제법 크다. 이런 빈대 같은 녀석 같으니라고! 한방에 제거해 주겠다며 간신히 뿌리와 줄기가 연결되는 지점을 잡았다.

이제 힘 조절이다. 행여 중간에 끊길세라 손가락 끝에다 초집중이다. 뿌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생각보다 고분고분하게 끌려 나온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조금만 더! 텃밭고수의 실력답게 끊기지 않고 깔끔하게 뽑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대형사고, 이제 뿌리 내림이 시작된 수국삽목이 덩달아 뽑혔다. 납작 엎드려 햇살을 원 없이 받아들인 비단풀(땅빈대)의 반기, 너 죽고 나 죽고 물귀신 작전이었다. 땅 위에 보이는 줄기보다 거대한 뿌리를 가졌다. 뽀얀고 통통하게 물이 오른 뿌리다. 꽃을 본 적이 없고, 보이는 족족 뽑아냈는데,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충실하게 자랐다. 화분 안뿐만 아니라 돌, 시멘트 틈에 빼곡히 자리 잡았다.

하찮게 여겨져 밟히고, 성가시다 호미질을 당하고, 배알이 꼴린다 하여 박멸에 이르기 다반사다. 짓밟히고 뽑히고 몰살 직전까지 가면서도 아픔 한번 말하지 못했다. 스쳐 가는 인연에도 끼지 못하니 푸념도 할 수 없었다. 속수무책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거해도 제거되지 않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여럿이 있다. 굳이 연대라 하지 않아도 되는 거대한 조직이 있다. 하여 드러낼 필요가 없는 아픔이다.

정해진 자리가 없다. 굳이 자리를 보존해야 할 필요가 없다. 자리를 탐하는 다른 잡초가 있다면 기꺼이 자리를 내준다. `어느 가족'처럼 새로운 연을 맺는다. 언제 제거될지 긴장할 필요가 없다. 앞으로가 아닌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기존에 자리했던 것들이 제거되면 다시 그 자리에 다른 것들이 찾는다. 끊임없이 자리를 채운다. 공간이 제법 찼다 싶으면 순서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하여 연착륙이다.

최소한의 것만 가지고 있다. 비대하지 않다. 다른 것과 비교할 이유가 없다. 각기 다른 잎을, 줄기를 뿌리를 가졌다. 그리고 촌스럽지만, 꽃을 피운다. 화려하게 부풀려 요란하지 않다. 가르치려 하거나 절대복종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가지고 있을 것을 이미 다 갖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나마 시들거나 죽으면 같이 했던 것들에게 내어 준다. 공벌레와 달팽이들이 위로차 밤을 지새운다. 하여 불필요한 것이 없다.

찾는 것들이 많다.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크니 이슬이 찾는다. 새벽이슬은 풀들에 상쾌한 목축임이 되고 벌레들의 목욕물이 된다. 새벽까지 방황하던 벌레가 떨어지는 이슬에 놀라 둥근 공이 되었다. 생동감을 얻은 커다란 잎 아래로 많은 벌레가 분주히 움직이고, 한낮의 햇살에 청개구리가 몸을 말리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미친바람도 찾는다. 하지만 잔잔한 풀 소리로 응수하며 상큼한 풀 내음을 전한다. 하여 모두의 터이다.

긴긴 가뭄에 작물은 타들어 가는데 풀은 다부지다.

물 고갈에 흙덩이를 움켜쥔 최소한의 뿌리를 가진 녀석과 그 끝을 알 수 없이 길게 뻗어 내려간 녀석이 있다. 애써 요구하지 않고 갈취하지 않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잠시 움츠리거나 끝을 알 수 없는 곳까지 찾아간다. 식물인간, 식물정치라 헐뜯는 종과는 비교할 수 없다. 끊임없이 확장하며 생존하는 치열한 움직임이다.

하나하나 보잘것없는 풀이지만 모여서 풀밭이 되었다. 인지하지 못하는 경쟁이 있다 하더라도 서로를 짓밟고 죽이는 일이 없다. 서로 배려하고 기여하여 번영하는 공간으로 만든다.

가장 하찮게 여겨지는 것이, 온갖 것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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