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이고 싶다
여자이고 싶다
  • 임현택 전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 승인 2022.05.17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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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전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임현택 전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코끝에 진하게 전해오는 향기를 따라간다. 가던 길 멈추고 꽃향기에 홀리여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본 하늘, 주렁주렁 복주머니가 가득 걸렸다. 마음을 훔친 아까시꽃, 외씨버선을 닮은 듯 복주머니를 닮은 듯한 아까시 꽃이 하늘에 꽃밭을 일궜다. 깨금발 들어 하늘에서 쏟아질 것 같은 아까시 꽃을 따려 가지를 잡아당기자 앙칼진 가시가 거세게 저항하는 냥 톡톡 찔러댄다. 나른하게 졸고 있는 오후 햇살을 머리에 이고 아까시 꽃송이를 바구니 가득 꺾어 담았다. 진달래꽃도 먹고 아카시 꽃도 따먹고 찔레순도 꺾어먹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아카시꽃 한 송이를 우물거리자 입안에 봄이 터진다.

그때도 그랬다. 이맘때면 시골학교는 잔칫날이었다. 성적순보다 자연과 어우러져 뛰놀던 시골 학교생활, 온 형제들이 다 다니고 있는 학교생활은 전교생 모두가 마을 형제자매들이었다. 아니 마을 주민들과 자유롭게 어우러지는 개방된 학교는 흑백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전원생활 같은 풍경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그리고 스승의 날을 합쳐 학생들과 어르신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교내 축제가 열렸다. 꼬깃꼬깃 만든 종이 카네이션을 선생님과 어르신 그리고 부모님 가슴에 달아주면서 눈물을 찍어내며 교가도 불렀다. 교단 옆에는 천막으로 내빈석을 마련하여 마을 어르신들을 모셨고, 선생님과 우리들은 부모님들과 시합과 게임 그리고 노래와 무용 등으로 가을운동회 못지않게 한마당 축제를 열었다. 운동장 구석구석 봄철 손님인 송화가루는 노랗게 치장을 하고도 모자라 바람이 불 때면 온몸을 흔들어 노랗게 흩날리며 분칠을 했다. 울타리에 늘어진 복주머니처럼 생긴 아까시 꽃에선 분탕질하는 화적 떼 같은 꿀벌 때문에 진종일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기는 축제를 더욱더 고조시켰다. 운동장 언저리엔 아침부터 달그락거리는 솥단지에선 윤기 잘잘 흐르는 밥과 깊은 맛이 우러나는 국이 뽀얀 김과 거품을 내뿜으며 펄펄 끓고 있었다. 한편에선 입맛을 돋우는 지짐이가 어머니들 손끝에서 노릇노릇하게 이리저리 뒤집힌다. 한바탕 함성을 치며 시합을 마친 우린 나무 그늘 아래로 달려간다. 봄나물로 성찬이 차려진 너른 자리 위에 선생님은 물론 온 마을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 숟가락 부딪치며 만찬을 즐겼다.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한 베이비부머 세대들, 똑같은 마음으로 기억 저 끄트머리에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끄집어내는 시기가 요즘이다. 때가 때인 만큼 요즘 동요가 한참이다. 어느 날, TV에서 간디학교 교가가 청아하고 맑은 아름다운 음색으로 미끄러지듯 흘러나온다. 이내 잔잔한 가슴에 파문이 인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별 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 가려 하네/ 아름다운 꿈꾸며 사랑하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 가네/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교가를 음미하면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내 나이 세 번째 스물을 맞이하고 있는데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니, 어쩌란 말인가. 마음이 바쁘다. 버킷리스트를 세심하게 차근차근 정리해 도전 목록을 작성했다.

입던 옷 벗어놓고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로의 삶, 훌훌 벗어놓고 홀가분한 몸으로 살고 싶다. 명예도 미움도 욕심도 다 벗어 놓고 나면 아까시의 희디흰 꽃처럼 싱그럽고 넉넉한 나날이 되지 않을까. 봄이 넘실대는 아까시나무숲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하늘에 걸렸던 꽃밭이 집안 가득 퍼진다. 이 봄날, 다시 꿈꾸며 엄마가 아닌 여자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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