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 유감(1)
폐교 유감(1)
  • 박영자 수필가
  • 승인 2022.05.11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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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영자 수필가
박영자 수필가

 

봄바람이 살랑대던 어느 날, 고향을 지키며 글을 쓰는 후배를 만나러 내 고향 충주에 다녀왔다. 코로나로 만나지 못하고, 내가 몸이 부실하여 전화로만 만나다가 성화에 못 이겨 두 판 잡고 버스를 탔다.

오랜만에 만나 밤잠을 설치며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고, 이튿날은 둘이서 추억 여행을 떠났다. 충주 시가지를 지나 목행리를 향하며 저만치 보이는 탄금대가 손짓했지만 그냥 바라보고 손만 흔들어 주었다. 목행리를 지나자니 다리 밑으로 흐르는 푸른 강물은 수십 년 전 그 때처럼 변함없이 유장하게 흐르고 있다.

목행리 다리에서 갑자기 `스끼야바시'라는 단어가 툭 튀어 나왔다. 수십 년 잊고 지낸 말이다. 20대 초반에 대미초교에 근무하면서 퇴근시간에 버스가 자주 없던 시절이라 기다리기 지루하면 무작정 걸어오다 버스가 오면 손을 들어 타곤 했다. 가끔은 목행다리까지 걸어와서는 일본 소설에 나오는 스끼야바시를 빗대어 그렇게 부르며 낭만에 젖곤 했었지. 곧 대미초교가 나왔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따로 있었기에 눈길만 주고는 지나쳤다.

산척을 지나 엄정으로 들어서는 바마루 고개에 이르러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주체 할 수가 없었다. 내 어린 시절의 아릿한 추억들 때문이었다. 곧 엄정초교에 당도했고 교정에 내려 보니 학교가 마치 성냥갑처럼 작게 느껴졌다. 내가 1,2학년 때 공부하던 교실로 짐작되는 곳을 기웃 거리며 가슴이 벅찼다. 토요일이라 학교는 조용했다. 나이도 미달인 나를 데려다 이 학교에 입학시키던 날 외할아버지는 내가 제일 앞에 서 있다는 것조차 자랑스러워서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지 않으셨던가. 3학년 초에 충주사범부속학교로 전학 왔는데도 나를 깍듯이 동창이라며 선배 대접을 하니 좀 우습기도 하다.

외갓집 초가삼간이 있던 자리에는 대궐 같은 집이 들어섰고 왜가리가 하얗게 서식하던 앞산은 텅텅 비어있다. 갈 길이 바쁘니 면사무소를 지나 목계나루를 휘돌아가니 자잘한 추억들이 와르르 마중 나온다.

산모롱이를 돌아 우리들의 목적지인 나의 초임지 야동초교에 들어섰을 때, 장난감 같은 단층의 교사가 썰렁하여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기대에 어긋나게 이 학교는 10여 년 전에 폐교 되었고, 내가 쓰던 서쪽 별관 교사 두 칸에 충주 사람이 카페를 차려 예쁘게 꾸며 놓고 운영하고 있었다. 커피 두 잔을 시켜 놓고 누가 이 카페에 들를까 싶었는데 동네 사람과 때로는 이 학교 졸업생들이 찾아주어 심심치는 않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열아홉시절의 나를 교단에 세워보고 빈 교실을 기웃거리다 학교를 뒤로하고 나오며 또 주체 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이 나이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자취 하던 집 앞을 지나 하숙 하던 집 앞을 누가 볼세라 바람처럼 지나며 만감이 교차된다. 지금 그 분 들은 살아 계시기나 하는 건지. 참으로 무정한 세월이었다. 충주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우리들의 추억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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