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타령
할아버지 타령
  •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 승인 2022.05.11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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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웬 할아버지 타령이냐고요.

아 글쎄 며칠 전 해거름에 운동 삼아 무심천둔치 길을 걷고 있는데 길섶에 서있던 젊은 여성 두 분이 `할아버지! 저희 센터 시설도 좋고 프로그램도 좋아요. 한번 놀러오세요. 잘 모실게요.'라면서 들고 있던 전단지를 건네주는 겁니다.

인근에 신장개업한 `노인주간보호센터와 노인요양원'을 홍보하는 분들이었는데 순간 기분이 묘했습니다. 아니 더러웠습니다.

싫은 내색하지 않고 전단지를 건네받기는 했지만 그들 눈에 노인요양시설 입소 대상자로 비쳐진 자신이 못 마땅했고 서글펐습니다.

딴에는 아직은 청춘이라고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 입는 추리닝을 입고, 창 달린 멋진 모자와 눈만 보이는 큼직한 마스크를 쓰고, 메이커 있는 트랙킹화까지 신고 보란 듯이 걸었는데도 영락없는 할아버지였다니 충격이 클 수밖에요.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더니 아무리 치장하고 변장해도 나이는 속일 수 없음을, 내 느린 걸음걸이와 처진 어깻죽지와 꺼부정한 허리가 `나는 할아버지야'라고 광고하고 있음을 깨닫고 애써 자위했습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손녀 둘에 손자가 하나 있으니 할아버지가 틀림없고, 예전 같으면 살아있음이 용하다고 할 70 고개를 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친손주 이외의 사람들로부터 할아버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니 참으로 요상한 심사입니다.

생업에서 은퇴해 백수로 산지도 어언 7년 느는 건 아픈 곳과 약봉지이고 주는 건 근력과 총기인데 마음의 시계란 놈이 고장 난 벽시계마냥 청장년 시간대에 머물러 있어서 분수를 모르고 주책을 부렸던 겁니다.

아직도 철이 덜 들어서, 아직도 동심과 청심이 살아있어서, 아직도 설렘과 그리움이 화롯불 불씨처럼 남아있어서 그런 것이니 나무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생각해보니 아니 살아보니 할아버지가 되는 것도 큰 축복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되어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이도 많거니와 할아버지가 되어 누리는 삶의 재미와 행복도 쏠쏠하기 때문입니다.

자식 키울 때 느껴보지 못했던 손주 보는 재미도 그 중 하나이고, 돈과 사랑과 명예에 휘둘렸던 팍팍한 삶에서 벗어나 세상을 관조하며 온유한 삶을 사는 즐거움도 그 중 하나입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머물고 싶으면 머물고 떠나고 싶으면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자유와 여유가 있으니 좋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말이 어눌해지니 남의 흉 덜 보고, 시력과 청력이 떨어지니 못 볼 것 못 들을 것 흘려보내고, 욕심과 사심이 줄어드니 사람도 자연도 모두 아름답게 보입니다.

할아버지가 되어보면 압니다. 아니 노인이 되어보면 압니다.

돈보다 건강이, 출세보다 사랑이 더 소중하다는 걸.

100세를 살아봤더니 75세 무렵이 인생의 황금기였다는 철학가 김형석 교수의 말처럼 저도 그렇게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싶습니다. 아니 그리 사는 것 같아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무튼 할아버지는 욕심으로 채운 것들을 사랑으로 비우는 이들이고 살아 움직이는 지혜의 보고이고 인생박물관입니다.

그렇다고 다 같은 할아버지가 아닙니다.

삶터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며 즐겁게 사는 자유분방한 할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요양원에서 눈칫밥과 허무를 먹고 사는 부자유한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오빠 소리 듣는 멋쟁이 할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고루하기 그지없는 영감탱이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고령사회를 넘어 초고령사회입니다.

하여 할아버지와 노인들이 지천인 세상입니다.

노후준비를 하지 못한 할아버지들의 한숨소리가 주위를 아프게 합니다.

그들의 노고와 헌신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에 국가와 지역사회가 그들을 보듬고 위무해야합니다.

존중받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는 있도록.

/시인·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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