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어느 날 거리 풍경
5월 어느 날 거리 풍경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5.0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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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서점에서 나왔을 때 도시는 온통 석양에 물들고 있었다. 그곳은 번화가 한복판. 사람들은 귀가를 서두르고, 잿빛 포장도로에 하얗게 칠해진 횡단보도를 바쁘게 지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었다.

그때 허리가 잔뜩 굽은 노파 한 사람이 계절이 지난 낡은 자주색 겨울옷을 입은 채 아주 느리게 길을 건너고 있었다. 공원 한구석에서 주은 듯한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반으로 꺾인 몸을 내맡긴 채 젊은 인파가 서로 엇갈리는 횡단보도를 힘겹게 건너는 모습이 유난히 내 눈앞에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노파의 아주 느린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는 동안, 빠르게 길을 건너고 있는 젊은 사람들은 일순 정지해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복잡한 도심을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네거리에서 다음 녹색불을 기다리고 있을 때, 거리를 가로질러 건너던 청년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봄바람은 솔찬히 불고 있었고 바람에 날린 찢어진 골판지 조각이 함부로 나뒹굴더니 차도 한복판을 점령한 채 위태롭게 펄럭거리고 있었다.

길을 건너던 한 청년이 허리를 숙여 꽤 커다란 종이상자 조각을 주워들더니 다시 발걸음을 돌려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키가 커다란 청년은 주워 든 종이 쓰레기를 차도 밖으로 가지고 나와 바람 안 드는 건물 사이에 알뜰하게 내려놓은 뒤 횡단보도로 돌아와 가야 할 길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5월의 거리에서 맞닥뜨린 두 개의 풍경은 환영처럼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나는 방금 사 온 시집을 무심하게 펼쳐 시 한 편을 읽는다.

누구도 그가 아니고/ 그와 비슷하지도 않으니까// 일터에 간 자식이 돌아오지 않거나/ 수학여행 간 자식이 오지 않은// 부모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말을 걸을 수 없을 테고/ 눈을 볼 수 없을 텐데/ 밥 먹고/ 게임하고/ 늦잠 자는 것도 볼 수 없을 텐데// 그건 어떤 걸까/ 어느 한쪽 편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겠지/ 왜냐면/ 그가 답을 안 하는 걸 테니까// 답이 없는 건/ 냄새도 소리도 웃음도 없는 거니까/ 그를 되돌려놓을 수 없는 거니까// 몇 날 며칠 바닥을 구르고/ 몇 끼를 굶고 잠을 안 자도/ 그는 오지 않는 거니까/ 부르면 대답해주던/ 그가 오지 않는 거니까//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거니까// 가슴이 온통 바닥에 떨어져 깨져버리니까/ 두 다리로 설 수도 없을 테니까// 누구도 그가 아니고/ 그와 비슷하지도 않으니까 <허연. 누구도 그가 아니니까> -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에서. 문학과지성사-

도심 번화가에 집중된 젊은 사람의 무리 가운데 허리가 잔뜩 굽은 노파의 느리고 힘겨운 움직임이 낯설다고 느끼는 것은 지극한 `오만과 편견'이다. 어느 누가 늙지 않고, 병들지 않아 한결같은 잰걸음으로 평생을 지탱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낡고 철 지난 겨울옷과 거칠고 고된 노동에 찌들어 직립이 무너져내린 서러움이 언제까지 이질적인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젊음이 아직 가 보지 못하고 도달하지 못한 한 사람의 역사가 점점 더 많은 사람의 일상이 될 초고령사회에서 우리는 언제까지 빠른 걸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잽싸고 빠르며 이기적인 청춘의 움직임을 무작정 걱정하는 인식이 지배하는, 그리고 그 젊음의 위태로움을 틈타 갈라치기로 손익계산을 하는 정치적 간계가 무차별 작동하는 세상.

목적지를 향해 직진하다가, 앞길을 가로막는 차도를 가로질러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맞닥뜨린 쓰레기를 피하지 않는 용기. 가던 길을 되돌아서며 쓰레기를 제거하는 젊은 이타심이 세상의 장애물을 기꺼이 제거하는 젊은 도전의 표상이 될 수 있는 희망을 5월의 거리에서 나는 보았다.

그러므로 이팝나무 하얀 꽃잎이 쌀밥처럼 부풀어 오르는 5월의 거리에서 늙어가는 모든 생명의 서러움과 싱그러운 청춘의 부푼 꿈을 스테레오로 느끼는 봄은 아련한 현기증의 계절.

`누구도 그가 아니고/ 그와 비슷하지 않으니까', 탄식처럼 4월에서 5월로 가슴에 맺힌 한이 고스란히 이어지는 고통은 언제쯤 멈출 수 있으랴.

마스크를 벗고 들숨 날숨이 자유로운 세상은 돌아왔는데, 5월에는 아직 온전히 돌아오지 못하는 먼 길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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