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日常)의 심연(深淵)
일상(日常)의 심연(深淵)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04.27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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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대학원 시절, 잘나가는 대기업을 다니던 후배가 찾아왔다.

형, 맥주 한 잔 합시다. 한잔하면서 하는 말인즉슨 지금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영화를 하고 싶단다. 왜 나한테 상의하냐고 했더니 형이 하던 일 그만두고 새로 만학도의 길을 걸었잖아. 인생을 한 번 바꿔본 경험이 있으니까. 그래서 내 경험대로 이야기했다. 좋기는 한데 어렵다. 안정된 직장을 때려치고서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 좋은데 첫발부터 다시 뗀다는 게 쉽지 않을 거다. 내 동생이나 아들 같으면 그냥 다니라고 말할 거다. 그런 이유라면 해보겠다고 하고 갔다.

그렇게 그 친구는 감독이 됐다. 첫 영화를 찍을 즈음 그 친구와 다시 만났다.

형, 나도 철학과를 나왔지만 철학은 인간 삶을 제대로 건드리지 못하는 것 같아. 형은 실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공부한 거도 자랑할 겸, 실존적 삶의 의미에 관해 신나게 떠들었다.

후배 왈: 실존 철학자들은 일상의 소중함과 무서움을 모르는 것 같아. 예를 들어 우리 엄마와 하이데거를 비교해보면 삶에 훨씬 가까이 와있는 건 엄마 말과 생활이거든. 하이데거의 실존적 체험(不安)은 멋은 있는데 겉멋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일상적 삶을 너무 가볍게 보는 것 같아. 일상성이 실존적 불안이라는 일회적 체험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을까? 삶에서의 특수한 체험, 죽음에 대한 예감이 실존주의자들이 역설하는 것처럼 엄청난 의미를 갖는 건 아닌 거 같아. 세상을 묵묵히 살아낸 엄마나 주변 사람들의 삶은 그런 별난 체험과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느낌들을 수용해서 꿀꺽 삼켜놓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곧 조용해지는 호수 같아. 훨씬 무섭지.

얼마 후 그 친구가 세상에 내놓은 영화가 8월의 크리스마스이다.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의 설렘과 떠들썩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모두의 명절이긴 하지만 왠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지나갈 듯한 제목이다. 내용도 그렇다. 다림(심은하)과 정원(한석규)의 사랑은 호들갑스럽지 않다. 시작도 명확하지 않고 진행도 선을 그을 수 없을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진행된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마음이 서서히 이끌렸고 그렇게 해서 가까워진 두 사람 사이에도 격정이나 폭풍, 마음 졸이는 줄다리기도 없다. 그렇게 가까워졌고 서로 확인하지 않아도 둘은 이미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죽음을 앞둔 정원이 다림의 근무 장면을 몰래 숨어서 지켜보면서 느끼는 애틋함,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정원의 사진관 유리를 박살 내는 다림의 애정 어린 분노가 이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확인해준다.

상대 마음속에 새겨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정원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고 다림에게 알리지도 않고 떠나간다. 조용히 다가와 다림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정원과 짜릿한 사랑의 즐거움을 확인하기도 전에 다림은 영문도 모른 채 혼자 남겨진다. 갑자기 사라진 정원에 대한 분노로 돌을 들어 유리창을 깨는 행동이 사랑 표현의 전부다. 일상의 세월이 흘러 소녀티를 벗어던진 다림이 옛 추억을 되살리며 다시 찾은 사진관에 걸려 있는 자신의 사진을 확인하고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띠며 일상으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난다.

두 사람의 만남, 사랑, 죽음, 이별이라는 떠들썩한 주제는 삶을 거창하거나 획기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 우리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건, 느낌, 체험들은 일상의 호수에 던져진 돌일 뿐이다.

이 돌은 하나의 작은 파문을 남기고 호수 깊숙한 곳으로 사라진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이렇게 거창한 인생의 문제들을 아무렇지 않게 꿀꺽 삼키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도도히 흘러간다.

인간들은 일상의 호수를 들끓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역부족이다. 왜 그러냐고? 다음에.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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