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지는 날 꽃 피우는 날
꽃 지는 날 꽃 피우는 날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2.04.26 17: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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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동백이 꽃을 피웠다.

겨울을 버티고 두터운 외투를 벗은 녹색의 잎 사이에 겹겹으로 모여 선홍빛의 붉은색을 피웠다.

처음에는 한두 송이 힘겹게 피워내던 꽃송이가 해를 거듭하며 존재감과 볼륨감을 제법 더했다. 덩달아 피워낸 꽃망울 하나하나가 도드라지게 뽐을 낸다.

송곳 찌를 정도의 땅을 차지하고 물에 갈증을 느끼던 1년생 나무였는데, 이젠 제법 둘레길이를 늘였다. 보이진 않지만, 사방으로 뻗어간 잔뿌리가 이젠 갈증에 목메지는 않는 듯하다.

선홍의 붉은색 겹꽃이 겨울을 난 짙은 녹색의 잎 사이에서 보색을 띤다. 동백을 어지간히 좋아하던 당신이 땅을 파고 심은 나무는 매년 그렇게 꽃을 피워냈다. 엄마가 애지중지하던 동백이다.

그 동백이 마지막 꽃을 떨구었다. 다소곳하게 툭 하니 떨어졌다.

지난해 쌓인 낙엽 위에 빛바랜 붉은색으로 꽃을 피웠다. 널찍하니 겹치지 않고 빈자리를 채워나가듯 떨어졌다.

떨어진 꽃송이는 주워내지 않았다. 붉은색은 색을 잃고 낙엽과 같은 짙은 갈색이 되었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장마를 견뎌내고 떨어지는 낙엽을 이불 삼아 나무 곁에서 겨울을 날 것이다. 그리고 또 꽃을 피울 것이다.

목단이 꽃을 피웠다.

해묵은 단단한 줄기 끝에 단아한 순을 보였다. 늘 말씀 없던 그분의 모습을 닮았다.

시간이 멈춘 듯 미동이 없다. 한낮으로는 더웠으나 새벽 나절 추웠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아무 말 없으신 그분의 모습이다. 짧은 봄이라 생각했던가? 일제히 꽃을 피워냈다. 깊은 향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꽃송이 앞에 세웠다.

“아버지!” 매년 아버지는 이렇게 아들을 불렀다.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목단이다.

그 목단이 꽃을 떨군다. 비가 와서 더 바쁘게 떨군다.

매일 매시간 찾았으나 꽃은 아주 짧게 피웠다.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듯 말끔하게 정리된 흙 위에 커다란 꽃잎을 떨군다.

덩달아 노란 술도 점점이 더해진다. 꽃잎은 힘없이 하늘거리며 떨어져 바닥에 꽃을 피웠다. 빈틈없이 바닥을 덮었다.

못내 아쉬워하는 나를 위로 하듯, 목단은 씨앗을 달았다. 끄트머리 붉은색을 아주 조금 남겨두고 씨앗 주머니를 만들었다.

꽃보다 더한 색이 그 안에서 익는다. 여름 내내. 그리고 가을이 돼선 잘 익은 색을 내밀 것이다. 그리고 또 꽃을 피울 것이다.

진즉 떨어졌어야 하는 동백은 목단이 피는 날을 기다려 애써 마지막 꽃송이를 떨구지 않았다. 나무에 매달려 볼썽사나울 만큼 색이 발했다. 겉으로 드러난 꽃송이를 떼어냈건만 잎사귀 깊은 곳에 선홍색 빛을 머금은 꽃송이를 달고 있었다. 꽃이 지는 날 꽃이 피었다.

지난한 겨울, 겨우내 멈춘 시간은 고통의 시간이다. 교묘히 드러내지 않는 생각의 무능은, 손톱 밑 아주 작은 가시를 찔러 넣는 악이다.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피할 수 없는 겨울이다. 버틸 수밖에 없는 겨울이다. 끝나지 않는 겨울 속에 계절의 봄은 왔고 이제 그 봄도 여름에 시간을 내어준다. 계절의 지난한 겨울의 시간에 꽃이 피는 시간은 찰나에 가깝다.

겨우내 앙상한 가지를 보며 당신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 되겠노라 다짐하고 봄을 준비한다.

행여 얼어 죽을까? 겨우내 그렇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기다리던 당신의 화사한 모습을 본다.

마지막 꽃을 떨구면서 늘 그 자리에 있노라 애써 위로하며. 끝나지 않는 겨울은 없다. 그렇게 말 없는 말을 남긴다. 이미 밟히고 부러진 나무지만 겨울의 끝에는 새순이 돋고 꽃이 핀다고. 꽃이 지는 날 꽃은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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