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선 도기가마 운영체제 알려준 진천 회죽리·구암리 가마터
고려·조선 도기가마 운영체제 알려준 진천 회죽리·구암리 가마터
  • 김태홍 충북도문화재연구원 조사 연구실장
  • 승인 2022.04.24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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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김태홍 충북도문화재연구원 조사 연구실장
김태홍 충북도문화재연구원 조사 연구실장

 

고려시대에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 중 일반인이 생산하기 어려운 특수한 물품을 所(고려시대 말단 행정구역)에서 전문적으로 생산하였다. 소의 종류는 자기를 만드는 자기소(磁器所), 철제품을 만드는 철소(鐵所), 금·은·동의 제품들을 만드는 금소(金所)·은소(銀所)·동소(銅所)와 실을 만드는 사소(絲所), 종이를 만드는 지소(紙所), 비단 옷감을 짜는 주소(紬所), 기와를 굽는 와소(瓦所) 등 다양하다.

자기의 경우는 전라남도 강진에 위치한 대구소(大口所)와 칠량소(七良所)의 자기소에서 왕실과 중앙 관청에서 사용하는 자기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도기를 어떻게 생산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신라시대에는 도기제작을 담당하는 와기전을 두고 제작한 반면에 고려시대에는 자기를 국가에 공급하는 체계 안에 도기생산도 함께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후기에 이르며 과도한 세금 수탈로 인해 부곡지역 주민들의 저항, 무신란, 몽골과의 전쟁, 공민왕대 잦은 전란, 사회 혼란을 틈탄 지배층들의 약탈 등으로 소의 해체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소의 해체는 국가적 수공업 조직의 파탄을 앞당겼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자기와 도기가마가 전국적인 확산되어 1424~1432년에 간행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자기소 139개소와 도기소 185개소 등 324개의 가마터가 기록되어 고려 말에서 불과 수십 년이 지나지 않아 전국적으로 자기와 도기가마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고려와 조선시대의 도기의 생산기록을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가마터가 진천군 광혜원면 회죽리와 구암리에서 조사되었다. 진천 선수촌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발굴조사되었으며, 진천 회죽리에서는 고려시대 도기가마 7기와 조선시대 도기가마 2기, 진천 구암리에서는 청자가마 2기, 작업장 1기, 고려시대 도기가마 7기, 조선시대 도기가마 9기가 확인되었다.

진천 회죽리와 구암리 유적의 도기가마는 가마를 축조하는 방법에 따라 비탈진 언덕을 약간 정리한 후 가마의 바닥면으로 사용하여 아궁이에서 굴뚝까지 일정한 경사를 가지는 지상식(地上式) 가마와 언덕을 수평 또는 경사지게 땅을 파내어 땅 아래로 가마가 설치된 지하식(地下式) 가마로 구분되었다.

특히, 지하식 도기가마는 청자가마와 50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들 도기가마 주변에서는 청자가마에서 생산된 많은 양의 청자가 출토되었고, 청자가마의 작업장에서도 도기가마에서 제작된 도기를 사용하여 청자를 제작하였다. 도기가마에서는 내부에 그릇을 놓을 때 바닥에 돌을 받쳐 그릇을 세우는 방식이 아닌 청자가마에서 그릇을 받치는 도침과 동일하게 도침을 사용하여 그릇을 제작하였다. 이같은 출토양상으로 보아 고려시대 진천 회죽리와 구암리의 장인집단은 청자와 도기를 동시에 제작하거나 자기 장인과 도기 장인이 서로에게 기술과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가마터를 운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진천 구암리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충청도 청주목 진천현 조에서 “…陶器所가 1곳이니, 현의 서쪽 狗死里에 있고 下品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진천 회죽리와 구암리에는 도기소가 위치하였으며, 도기를 생산하던 장인집단이 독자적으로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진천 회죽리와 구암리가마터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오랜 시간 자기와 도기를 생산하였으며, 고려시대의 자기의 생산체계 안에 존재하였던 도기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도기의 독자 생산체계로 변화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발굴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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