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는 길
함께 가는 길
  • 전영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22.04.12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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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전영순 문학평론가
전영순 문학평론가

 

어제는 숙이와 걷고, 오늘은 주영이랑 걷는다. 키 큰 상수리나무와 소나무와 개암나무들이 우거진 산길에 새순이 돋고 새들이 지저귄다. 돋아나는 생명과 눈인사를 하며 호사를 누리는 나날이다.

요즘은 일일신우일신이다. 누구랑 걸어도 싫지 않은 길에 삽상한 바람이 분다. 바람 타고 참꽃이 피고, 산 목련이 피고, 생강꽃이 피고 초록이 눈을 뜬다. 요맘때 이 길을 걸으면 내게도 연둣빛 희망이 움트고 행인의 이야기는 길 위에 다정히 놓인다.

4월이 되니 헐벗었던 나무들도 본연의 정체성 드러내기에 한창이다. 시기에 알맞은 빛깔과 모양으로 `저, 여기 있어요.'로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하는데, 나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리. 나, 또한 그들 곁으로 다가가 멋진 선물 줘서 고맙다고 답례를 한다. 따사로운 햇볕과 삽상한 바람, 청아한 새소리, 삽상한 바람으로 시작하는 4월이다.

같은 길로 다니는데 평상시 보지 못했던 것들이 새롭게 다가오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렇다. 분명 낙엽이 진 지가 몇 달이 되었는데 길 옆 나뭇가지에 얹힌 둥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둥지를 인식하고 다가갔을 때는 이미 새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없다. 빈 집 한 채 덩그러니 장식처럼 놓여 있다. 소유권 이전도 하지 않고 말없이 떠났다. 산길 왼편에는 투기 바람이 불어 난개발로 한창이다. 개발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이주한 것일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구룡산, 한때 청주시와 소유주, 시민단체가 구룡산 개발을 두고 팽팽하게 맞섰던 곳이다. 2020년 7월 1일 도시공원 일몰제로 구룡산은 아파트와 전원주택지로 조금씩 개발되고 있다. 전원주택 뒷산도 나무를 베었다. 이곳도 머잖아 토막이 날 것 같다. 아쉬워하면서도 나도 집을 짓는다면 양지바른 이곳에 짓고 싶다. 내가 걷고 싶은 길과 내가 살고 싶은 집 사이에서 자신과 타인의 경계가 아이러니하다.

친구와 걷다가 볕이 좋아 산소 위에 앉아 풍광을 바라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 길을 지날 때마다 산 아래 뙈기밭에 서 있는 큰 나무 한 그루가 탐났다. 내가 저 나무의 주인이 되어 나무 아래 평상을 놓고 봄 여름 가을을 유유자적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오늘은 내려가는 길이 무서워서 싫다는 벗을 데리고 나무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봄이라서 세상이 훤하게 드러나서 다행이다. 언덕 아래 주인 없는 빈 막사와 오래된 물품들이 흉하게 너부러져 있다. 조금 더 걸어가니 밭둑 입구에서 개들이 요란하게 짖는다. 살살 달래며 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엄청 큰 느티나무다. 휘청하게 뻗어난 가지와 파릇 돋아난 잎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웅장한 나무와 뻗어난 줄기, 파릇하게 돋기 시작하는 잎들을 보며 걷는 발길에 설레는 마음을 곁들여본다. 가까이 다가가니 나무 아래 폐품이 가득 쌓여 있고 나무 기둥 일부는 잔병을 치르고 있다. 느티나무가 마음에 들어 이 땅의 주인이 되고자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마음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봄여름가을겨울 어느 계절에도 잘 어울리는 길, 누구랑 걸어도 좋은 길, 언제나 걸을 수 있는 길, 내 주위에 쉴 곳이 있어 행복상에 신선한 찬을 더한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 단순한 본능과 욕망, 자본이란 이름으로 물고 뜯는 세상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를 거슬리지 않는 살만한 세상이 오기를 꿈꾼다. 후대들도 나와 같이 이 길을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현명한 이여, “적당히 하세요”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요, 내가 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고은 시인의 단시가 하산길에 놓인다.

내려올 때 보았네

올라올 때 못 본 그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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