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공간
평화의 공간
  • 형경우 충북도 환경정책과 주무관
  • 승인 2022.04.05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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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형경우 충북도 환경정책과 주무관
형경우 충북도 환경정책과 주무관

 

내가 군 복무를 했던 곳은 강원도의 최전방 산골짜기 지역이었다. 휴전선으로부터 북쪽으로 2㎞ 펼쳐져 있는 비무장지대(DMZ)를 감시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임무였다. 남북의 대치상황을 실시간으로 체험하는 현장인 근무초소에는 늘 긴장감이 넘쳤고 철책선 너머로부터 알 수 없는 적막감이 흘러 들어왔다.

주간근무를 하는 날이었다. 날씨가 화창하고 햇볕이 따듯해서 그런지, 그날따라 이전에 눈이 들어오지 않던 철책선 안 풍경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V자로 형성된 계곡을 내려다보니 형형색색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만발하였고 총천연색으로 단장한 자그맣고 어여쁜 새들이 그 위를 사뿐히 노닐었다. 따사로운 햇살과 은은한 꽃내음, 청량감 있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환상적 장관을 만끽하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공감각적 심상'이 눈앞에서 완벽하게 구현되었던 순간은 그 이전은 물론 이후에도 없었다.

그 장면이 강렬한 추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건 인생에서 손꼽을 정도로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그 순간이 아이러니하게도 길고 어두운 터널과도 같던 군 생활 중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실탄과 수류탄으로 중무장한 상태였지만 호젓한 봄날의 분위기에 심리적으로 완전히 무장해제 되었다. 내재된 폭력성과 호전성이 강화되고 효과적인 인명 살상기술을 연마하는 그곳에서, 그날만큼은 주적 개념이 흔들리며 부지불식간에 반전주의자로 변모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비무장지대는 가슴 아픈 남북 분단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자연 생태계의 보고이자 참된 평화를 느낄 수 있었던 체험의 현장으로 남아 있다.

병역 의무에서 벗어난 지 오래 되었으나 여전히 내게 평화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인 비무장지대를 떠올릴 때가 종종 있다. 치열한 사회생활의 일환으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갈등 상황이라든가, 갖가지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내면이 전쟁터를 방불할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그럴 때면 나의 비무장지대는 신비한 영험을 발휘해 나 자신 혹은 누군가에게 겨눴던 총부리를 거두게 만들고, 만만찮은 삶이란 전투에서 잠시 쉬어가게 해 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이다. 발단이 무엇이든 그로 인해 고통의 한복판에 서 있을 양국 국민들에게 하루 빨리 평온한 일상이 돌아오길 기도한다.

이들의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에서도 희망의 씨앗이 발아하길 소망한다. 70여년 전 한반도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 평화의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처럼. 어디 이들 뿐이겠는가. 코로나 팬데믹에 경제 위기, 그 밖에 저마다의 사연으로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 모든 이들의 마음 한 켠에 비무장 공간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기후위기와 전염병, 전쟁으로 신음하는 지구 생태계의 회복을 위해 싸우는 모든 이들에게 선물과도 같은 평화와 안식의 순간이 찾아오기를 염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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