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들로 북적이는 선잠의 시간
손님들로 북적이는 선잠의 시간
  • 신은진 한국독서심리상담학회장
  • 승인 2022.03.31 17: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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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 이야기
신은진 한국독서심리상담학회장
신은진 한국독서심리상담학회장

 

인간의 감각기관은 예민해서 작은 자극이나 사소한 경험도 그냥 지나치는 것이 없다. 스쳐 지나간 것 같지만 언제고 내 꿈으로 불려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길을 걸으며 본 빛을 쬐고 있는 고양이나 나이 든 아저씨는 꿈의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 사소한 기억들, 기억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껴지는 것들이 꿈에 자주 등장하곤 한다. 오히려 중요한 경험이나 강한 자극들은 꿈에 재현되지 않는다.

제목만으로도 마음을 끄는 책이 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후안 무뇨스 테바르 글, 라몬 파리스 그림, 문주선 옮김, 모래알)'가 그렇다. 검은색의 표지와 작은 별빛들이 그 밤으로 나를 초대하는 것 같다.

나는 잠의 세계로 쉽게 들어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불면증이라 부른다. 몸은 잠을 자고 원하고 눈은 감고 있지만, 정신은 깨어 있어 혼재된 느낌의 시간이다, 그림책의 주제가 불면의 밤이라니, 훅 마음이 간다.

주인공 엘리사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그곳을 향한다. 그곳은 모든 것이 고요하다. 엘리사는 그곳에서 친구, 에스테발도를 만난다. 둘은 나란히 발걸음이 가는 대로 걷고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는다. 이제 그곳은 하품으로 가득하고 둘은 다음에 또 만나자고 인사하고 돌아온 엘리사는 잠을 잔다.

책표지와 면지 모두 캄캄한 밤을 연상시킨다. 빛은 주인공이 손에 든 불빛과 에스테발도가 모은 불빛뿐이다. 어두우니 별도 잘 보이고 불빛에 반사되어 엘리사의 얼굴 또한 잘 보인다.

그곳은 어떤 곳일까? 표범과 뱀, 악어가 있고 풀숲은 살아 움직이듯 환상적이다. 어찌 보면 그곳은 무섭고 두려운 곳이다. 의식적인 나는 그곳을 산책할 수 없다. 에스테발도는 처음 보는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환상의 동물이 있는 곳, 그곳을 산책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통제하지 않고 가만히 두어야 할 것 같다. 그런 후에야 에스테발도를 만날 수 있다.

그림책의 원제는 `duermevela'로 스페인어로 `선잠'이라고 한다. 작가가 아들의 잠자리에서 들려준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영화로, 노래로 선잠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우리가 깊은 잠으로 가는 길목에서 한 번은 경험했을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은 선잠이 길어지면 불안해하면서 수면장애로 인식한다. 그 시간을 통제하고 싶은 우리의 마음이 불안과 걱정을 만든다. 좀 더 쉽게 잠들기를 원하며 정신을 조정하고 싶어 한다.

선잠의 시간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이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이기도 하다. 그곳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에 먼 옛날의 티끌만한 기억도 찾아오고 스쳐 가며 눈에 담겼던 장면도 만날 수 있다. 자유롭게 미래로 과거로 오가는 생각들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의식의 흐름으로만 존재한다. 멈추려고 버둥거려도 깊은 잠으로 빨리 가려고 발버둥 쳐도 속도를 낼 수 없다. 흘려보냈던 수많은 생각과 마음들이 찾아와 노니는 곳이 그곳이다. 그래서 쓸모없는 생각이라 치부하지 말고 빨리 벗어나려 애쓰지 않고 엘리사가 그런 것처럼 보이면 보이는 대로 들리면 들리는 대로 생각이 이끌면 이끄는 대로 그곳을 산책해보면 좋을 것이다.

정신분석치료 기법 중에 자유연상이 있다.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말하며 마음의 변화를 따라가며 내담자의 저항과 전이를 찾는다. 선잠의 시간, 낮 동안 의식이 이끌었던 내 몸과 마음이 쉬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고, 의식의 흐름에 맡겨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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