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4)
산책(4)
  • 반영호 시인
  • 승인 2022.03.3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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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반영호 시인
반영호 시인

 

행치마을을 조금 내려오면 상노리다. 36번 국도 옆으로 개울이다. 개울물길 따라 걷는다. 한 길을 넘는 키의 갈대밭. 아니 억새인지도 모른다. 갈대와 억새는 모양새가 비슷하여 아직 확실히 구분을 못 한다. 그저 꽃처럼 핀 머리 수술이 흰 것은 억새이고 갈색이면 갈대라는 정도의 얕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저것들을 갈대라고 생각하고 싶다. 개울엔 습기가 많다. 물가에 많이 자란다니 갈대가 아닐까. 반대로 하천 둑에 듬성듬성 군락을 이룬 것이야말로 억새 같다. 키가 좀 작고 잎도 억세니 억새가 분명한 듯싶다.

물가 둔덕진 곳이 있다. 둔치다. 잠시 둔치의 바위에 걸터앉아 오래전에 적었던 시조 한 수를 읊어본다.



개울가 언덕에서 손짓하는 저 여인/ 다기서면 손 사래질 돌아서도 손 사래질/ 저 손짓 오라는 손짓인지 가라는 손짓인지/ 향기 없는 얼굴로도 꽃처럼 살고파서/ 잔잔한 바람에도 나부끼는 화냥끼/ 春夏秋 버텨온 시간만큼 누리고픈 저 아련함이여//



바람이 불 때마다 마른 잎이 부딪히는 소란스런 소리가 빗소리 같다. 한여름 왕성했던 대에 물이 내리고, 천천히 마르고 나면 비록 굵기는 그만 못하지만, 대나무만큼이나 딱딱해진다. 갈대나 억새는 꽃이 피지 않는다. 꽃이 피지 않으나 꽃 대신 씨앗이 맺는 곳에 꽃술이 꽃처럼 피어서 아무도 꽃피우지 않는 계절 도도하게 핀다. 쓸쓸해 보이지만 또 다른 의미로 독야백백하는 자태.

왜 아닐까. 전엔 웅덩이도 있고 잔돌 큰 돌들이 있어 고기들이 모여 살았다. 어렸을 때 여름이면 발가벗고 멱 감으며 물고기를 잡았었던 곳이다. 4대강 사업 후 깨끗해지긴 했으나 물이 고이지 않고 금세 쪽 흘러버려 지금은 물놀이는 물론 못하고 고기들이 살지 못해 아쉬움 이 크다. 개울이 개울다워야 운치도 있고 제 맛이 나는 데 삭막한 느낌마저 주어 개울이라는 말뿐이지 초라한 개울이다.

개울다운 개울은 한참을 더 내려와서야 만날 수 있다. 음성천과 하당천이 만나는 합수머리에 와서야 제대로 된 물길이 형성된다. 그만큼 음성천에서 내려오는 물량이 많다는 이야기다. 합수머리에는 백사장도 있고 자갈밭도 있다. 물이 흐르지 않는 넓은 습지에는 커다란 갈대밭이 형성되어 있고 청둥오리와 백로가 서식하기에 좋은 여건이 마련되어서 수백 마리의 새떼들이 자맥질하며 한가로이 먹이를 찾고 있다. 인기척이 들리자 동시다발적으로 물을 박차고 하늘로 오르는 모습은 과히 장관이다.

하당천과 음성천의 물량은 별것 아니지만 두 개울이 만난 합수머리부터는 과히 샛강이라 불릴 만큼 넉넉히 흐르고 있다. 어릴 적 이곳에서 멱을 감으며 놀았다. 음성읍에 사는 아이들과 서로 좋은 곳을 차지하기 위한 패싸움도 종종 벌이곤 했던 추억어린 곳이다.

이곳에서 오성산 쪽으로 500m 올라가면 내가 기거하며 농사를 짓는 밭이다. 들과 산이 만나는 이곳 밤나무골을 산이라 불러야 할지, 들이라 불러야 할지 애매한 곳으로 휴일이면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가 농사일을 도와주며 행복한 주말을 보낸다. 가막산자락 오성산 기슭으로 음성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광주반씨 선영을 모신 가히 명당이다. 손자 손녀는 이곳을 `할아버지 농장'이라고 부른다.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아름다운 새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 밭 윗머리 쪽에 이동식 컨테이너는 내가 평소 창작활동을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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