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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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22.03.30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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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인영 사진가
정인영 사진가

 

내 고향은 야트막한 장미산 아래로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중원고구려비와 중앙탑이 있어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곳이다. 집과 학교가 동네 한가운데 있어서 늘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집으로 가고 오면서 살았다.

비록 어려운 살림살이였지만 부모님의 사랑은 모자람이 없었다. 철부지여서 그런지 몰라도 꿈과 지혜, 용기는 없었지만, 선생님 말씀 귀 기울여 듣고 보면서, 읽고 쓰는 공부에 성실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서 중학교에 갈 시기가 다가오자 어렴풋이 미지의 세계를 그리곤 했다. 중학교는 어느 학교일까, 시험을 보면 합격은 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지냈다. 그렇게 졸업을 두어 달 남짓 했을 때 중학교에 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등록금과 책값을 포함한 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아버지의 병환 때문이었다. 중풍으로 10여 리 떨어진 곳을 오가며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차도가 없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사정에 산 넘어 산이었다. 집을 나와 마을 앞 물가를 거닐었다. 숨죽여 흐르는 강을 보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중학교에 꼭 가겠다는 간절함도 없었지만, 가지 않는다는 생각도 안 해봤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학교에 가 공부 열심히 하고, 집에 와서도 바뀐 것은 없었다. 선생님이 어느 중학교에 시험 보내고 물으시면 청주라고만 말했다. 집안 사정은 생각도 하지 않고, 중학교에 갈 것이라는 데에만 있었다.

졸업을 며칠 앞둔 날 저녁 어머니가 조용히 부르셨다. 중학교에 못 보낸다는 이야기였다. 졸업식날 우등상장과 졸업장을 받아들고 힘없는 발걸음으로 교문을 나왔다. 모든 것을 잊자는 마음이었다.

천성적으로 몸이 약해서 농사일은 할 수도 없었기에 집에서 그냥저냥 하루를 보냈다. 2년 세월이 흘렀다. 한문공부 몇 달, 글씨 쓰고 읽고 하는 것 외에 별 의미 없는 날의 연속이었다.

집이 있는 땅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귀에 번쩍하는 소리를 들었다. 스피커에서 기술에 관한 이야기였다. 기술을 배워서 기술자가 되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초등학교 동창회를 한다는 연락이 왔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날 기회였다.

동창회가 열리는 날 푸른색 모자에 `기술자가 되어야지.'라고 글씨를 써서 머리에 쓰고 갔다. 여학생 62명, 남학생 62명이었는데 70여 명이 참석했다. 6학년 담임선생님도 와서 그동안의 궁금함을 푸는 것은 물론 준비한 다과와 음료로 즐겁게 지냈다.

누군가 나를 보더니 “기술자가 되는거야? 참 좋은 생각이다”고 말했다. 괜히 기분이 좋았다.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꿈이 부풀어 오르고, 밝은 앞날이 점쳐지기도 했다. 그때까지 나는 진짜 촌놈이었다. 집 떠나면 죽는 줄 알았고,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할지, 누가 나를 기술을 가르쳐줄 것인지에 까지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모르면 알아야 했다. 집을 벗어나 미지의 세상으로 나서야 한다는 마음에 이르렀다. 도시로 가면 기술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청주로 가는 방법이 있다고 믿음을 갖는 순간 모든 일이 친척이 있었다. 새로운 내 인생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잘 될 거야라고 주문도 외웠다. 가금초등학교. 그날의 동창회가 청주로 이끌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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