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심(農心)
농심(農心)
  • 장갑순 서산시의회 의원
  • 승인 2022.03.23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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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장갑순 서산시의회 의원
장갑순 서산시의회 의원

 

어릴적 겨울이 되면 논은 우리에게 좋은 놀이터가 됐다. 찬 바람에도 무엇이 그리 좋은지, 썰매며 비료 포대며 어느 하나 가릴 것 없이 미끄러져 나가면서 서로 얽혀 웃고 떠들어댔다.

남몰래 내린 눈이 땅에 모두 스며들 즈음, 다시 이어지는 기억들. 논은 그렇게 유년 시절 기억의 전부가 됐고, 지금껏 논을 지키며 살아온 필자는 지금의 정부가 내세우는 `경쟁'이라는 단어가 왠지 어색하고 낯설다.

시장격리는 쉽게 말해 정부 매입이다. 변동직불제가 폐지되면서 쌀가격 안정화를 위해 제도화됐다. 농민들은 크게 기대했었다.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낮은 낙찰가격, 대규모 유찰사태, 쌀값 폭락은 농민 결사대를 서울로 상경시켰다.

정부 고위 관료는 생각했을 것이다. `쌀 가격도 경쟁이지. 경쟁이 없는 산업이 어디 있으랴.' 그러고는 역공매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결과는 최저가 입찰. 보기 좋게 적중했다. 때문에 조선시대 양반의 피를 이어받은 격조 높은 어르신들마저도 반백년 어린 수험생들처럼 눈치작전을 펼쳐야만 했다.

수술 날짜를 결정하는 주치의는 환자의 상태를 두루 살펴야 한다. 환자의 몸 상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명의(名醫)라도 준비가 안 된 환자의 처진 배를 가를 수는 없다. 결정했다면 집도는 빠르고 정확해야 한다. 그래야 생명을 살릴 수 있다.

쌀값 하락이 예상되고 시행 요건이 충족됐다면 지체없는 시장격리로 안정된 가격을 보장해야 한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가격에서 시행하는 시장격리는 가격 하락을 위한 경쟁이 아닌가?

인심 좋게도 입찰 물량은 최소 100톤. 농민들의 참여 보장이라는 말은 덤이다. 이번 시장격리 결과 낙찰 물량의 65%는 농협 물량이라는 사실에 일반 농민들은 한숨이 절로 난다.

낙찰가는 6만3763원(조곡 40㎏/가마)으로 결정. 부대비용을 제외하면 산지 가격보다 한참 낮은 6만원대. 이마저도 계획했던 물량의 27%에 달하는 5만5000톤은 유찰됐다.

합리적인 소비라고 하나?

물건은 직접 눈으로 보고 구매는 인터넷 최저가를 찾는다. 같은 물건도 남들보다 비싼 값에 구매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분노케 한다.

생명 산업인 쌀도 이런 운명을 맞아야 하나?

최저가 입찰 방식 변경, 시장격리 요건 형성 즉시 실시, 유찰된 물량 시장격리 등 보호가 필요한 산업을 제때 보호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나이 탓일까?

요즘은 조금 전 생각했던 일을 잊어버리는 날이 유독 많아졌다. 그 일이 본인과 관련된 일이면 그래도 나을 텐데 가족과 관련된 일이라든지, 남들과 연관된 일이라면 참으로 난감할 때가 많다.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기 위해 메모하는 습관이 생긴 것도 요 몇 년 사이 일이다.

그래도 수십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들. 눅눅했던 그해 여름. 아버지 땀의 열기, 열기가 잦아들 때쯤 맡았던 냄새는 그해 보았던 담배 연기처럼 아련했고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겨울 놀이는 논이라는 무대 속에서 각인된 추억이 되었다.

이제 곧 추위가 물러가고 봄이온다. 봄은 항상 겨울을 보기 좋게 몰아냈다. 봄의 향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할 것이다. 농민들은 오늘도 일하러 나갈 채비를 한다. 산과 들, 그리고 땅은 그러한 농민들을 순수하게 맞이할 것이다. 아무런 경쟁 없이 노력한 만큼 마음껏 거두시라는 듯. 그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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