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의 봄
산골의 봄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2.03.21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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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아무리 깊은 산골이라도 봄은 찾아온다. 사람의 왕래가 있건 말건 봄은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 낸다. 꽃은 피게 하고 풀과 잎은 새로 돋게 한다. 하루가 다르게 봄이 연출하는 자연의 변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고려(高麗)의 시인 왕백(王伯)은 깊은 산골에서 봄의 마법을 목도한 행운아였다.


산골의 봄(山居春日)

村家昨夜雨濛濛(촌가작야우몽몽) 시골집에 지난밤, 비가 자욱이 내리니
竹外桃花忽放紅(죽외도화홀방홍) 대밭 밖 복사꽃이 갑자기 붉은 망울 터뜨렸네
醉裏不知雙鬢雪(취리부지쌍빈설) 술에 취해 양쪽 살쩍에 눈 내린 걸 모르고
折簪繁萼立東風(절잠번악입동풍) 부쩍 자란 꽃받침 꺾어 머리에 꽂고 봄바람에 서네

시인이 기거하는 곳은 깊은 산골이다. 사람의 왕래마저 뜸한 이 외진 곳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을 터이지만, 아직은 낌새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기폭제는 엊저녁에 자욱이 내리던 비였다. 비가 그치고 아침에 집 밖으로 나섰다가, 시인은 놀라운 광경을 목도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복사꽃이 대밭 밖에 붉은 꽃망울을 터뜨린 것이다.

시인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니, 경이롭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터뜨린 복사꽃 꽃망울 하나가 시인으로 하여금 봄을 실감하게 만든 것이리라.

봄의 흥취에 빠진 시인은 술 한 잔을 찾지 않고 배길 수는 없다. 술에 취한 시인은 자신의 양 살쩍에 흰 눈이 내려앉은 것도 모르고, 아직도 어린 아이인 양, 부쩍 자란 꽃받침을 하얀 머리에 꽂고는 봄바람을 쐬었다. 갑자기 느낀 봄의 정취가 시인을 나이도 잊고 들떠 하는 어린 아이로 만들었던 것이다.

봄이 왔어도 봄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느닷없이 봄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마당에 그간 보이지 않던 꽃 한 송이가 눈에 띄는 날, 봄이 그대 앞에 이미 와 있음을 실감할 것이다.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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