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형에게
B형에게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8.09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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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억 수<시인>

B형! 지루한 장마가 지났나 싶더니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지 먹구름이 또다시 하늘을 덮고 몰려듭니다. 요란한 천둥번개를 대동한 국지성 소나기는 굵은 빗줄기를 마구 쏟아 붓고 있습니다. 이렇게 날씨가 어수선하고 마음이 심란할 때 늘 생각나는 사람이 형입니다.

한때는 저 사나운 날씨처럼 걷잡을 수 없는 격동적이고 천지분간 할 줄 모르는 어두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때 형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참으로 암담하고 삭막한 인생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형은 말로 사람을 가르치려 들지 않았습니다. 말없이 세상을 바로 보는 법을 알게 해준 사람입니다. 문학이라는 깊고도 넓은 세계로 나를 이끈 사람도 형입니다. 문학이라는 돌파구가 없었다면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내면의 갈등과 암담한 현실을 참아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요즈음 참으로 공허하고 허전할 때가 많습니다.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가당치 않은 목표를 세워 놓고 내딴에는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욕심 저 욕심 너무 많이 부렸습니다. 이제 생각하니 작은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 같기도 하구요. 이렇게 마음이 공허하고 허전한 것은 뭔가 바라고 채우려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제라도 마음을 비우려 노력해 보겠습니다. 가슴 답답하고 일이 잘 안 풀릴 때, 나만 고통 받는 것 같은 억울한 생각이들 때, 형은 언제나 내편이었습니다. 그때마다 형은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으로 '그거 별거 아니야' 하곤 했습니다. 둘이 마주앉아 아무말 없이 술잔만 기울이고도 돌아서면 울적했던 기분이 어느새 좋아지곤 했습니다.

이제 생각하면 나는 늘 형에게 받으려고만 했던 것 같습니다. 형에게 나만 힘들다고, 고통스럽다고, 위로 받았으니까요. 형은 나보다 더 힘든 시간, 더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으니 부끄럽기만 합니다.

돌이켜 생각하니 참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형은 늘 비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꽉 찬 사람, 말없이 그저 빙그레 웃는 모습에서도 많은 말을 전해주는 사람, 가슴이 늘 따듯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형! 형도 이제 '힘들다. 속상하다, 짜증난다' 하고 말씀하세요. 형이 그랬던 것처럼 형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서 나도 형 말씀을 묵묵히 듣다가 그냥 빙그레 웃겠습니다. 이제는 마주보고 그냥 웃어도 마음이 통하는 그런 사이 아닌가요.

마른 번개가 또 호령을 하며 하늘을 가르고 있습니다. 이제는 천둥번개 그리고 소나기 뒤에는 맑은 하늘이 기다리고 있음도 알기에 깜깜한 하늘마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 형님 덕이지요. 형 이제 세월이 많이 지나 형이나 나나 함께 늙어가고 있습니다. 남은 세월도 지금처럼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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