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지기
익숙해지기
  •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 승인 2022.03.1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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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십 년 만에 하는 열다섯 번째의 이사다. 구정 명절이 지나자마자 도심의 끝에서 또 다른 끝인, 산골에서 산골로 거처를 옮겼다. 지인들은 나이 들었으니 편리한 아파트에서 살지 불편하게 주택으로 가느냐고 한다. 아파트에서 살아보니 편리함보다는 불편한 일이 많았다. 식구끼리만 살아도 늘 조용해야 하고 한밤중 제사를 지내거나 가족 모임이라도 있으면 죄인처럼 아래위층의 눈치를 봐야 했다. 산골에서는 내 멋에 겨워도 남의 눈치 볼 일 없어 그리 편할 수가 없다.

이곳에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같은 지명 안에서도 자리를 이동하면 낯설다. 아직도 주민들과는 정식으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스스럼없이 얼굴을 마주하기엔 서로가 조심스러워 선득 나서지를 못한다. 어쩌면 핑계일지도 모른다.

새집으로 오면서 좋은 마음도 있지만 걱정도 앞섰다. 이번에는 제대로 활착할 수 있을까. 언제쯤이나 주변 풍경과 주민들과 익숙해질 수 있을까. 나무나 꽃도 자리를 옮겨 심으면 누렇게 떠서 몸살을 앓는데 쉽사리 사람을 사귀지 못하는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아 자꾸 으슬으슬 춥다. 봄이라지만 여백의 산과 들판은 아직도 가난해서 더 낯설고 서먹하다.

이사란 사는 곳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가리키는 사회학 용어다. 누구나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이사를 하지만 내가 했던 열네 번의 이사는 집에 대한 좋은 조건을 따지기 전에 밥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 풍수지리를 본다거나 손 없는 날을 가리지도 않았다. 마치 원시인들이 강을 따라 먹을 것을 찾아 이동하듯 그렇게 이사를 했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수시로 떠나야 하니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깊어질 수가 없었다. 어느 동네에선 오 년을 살았어도 집 앞 마트나 세탁소 주인의 얼굴만 겨우 익히고 떠나기도 했다. 한데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잠시만 살자고 들어간 산골 집에서 제일 오래 살았다. 십 년이 넘는 세월을 한 가족처럼 챙겨주고 다독여 주던 정든 사람들을 떠나왔다. 고향처럼 자꾸 마음이 향하는 곳이다. 무엇보다 데려올 수 없었던 들고양이들의 안부가 몹시 걱정된다. 아침이면 밥 달라고 현관 앞에 모여 있던 애처로운 눈망울들, 외출했다 돌아오는 차 소리만 들려도 우르르 몰려오던 열두 마리의 고양이들이 우편물을 가지러 갔을 때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 가슴이 내려앉기도 했다. 어느 집에서 든 거둘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에도 그들과의 인연도 여기까지라고 생각하니 우울함이 몸을 덮는다. 생명이 있는 것들과 이별하는 일은 이토록 무겁다.

수시로 거처를 옮기면서 많은 인연을 맺었다. 깊은 인연은 오래도록 변함없이 이어지고 스치는 인연은 무심해진다. 그러나 떠나와서 돌아보니 내가 살다 온 곳에서 만난 소소한 인연도 모두 의미가 있었고 나를 여물게 했다. 이젠 이곳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자연과 풍광에 익숙해져야 한다. 떠나온 것에 대한 그리움은 그리운 채로 두고.

삶이란 끊임없이 낯선 누군가를 만나 익숙해지며 피안의 세계를 향해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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