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안경
회색 안경
  • 반지아 수필가(괴산 청안초 행정실장)
  • 승인 2022.03.13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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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반지아 수필가(괴산 청안초 행정실장)
반지아 수필가(괴산 청안초 행정실장)

 

어느 평범한 출근길이었다. 이제 우회전 한 번이면 도착인데 낯선 사람이 겁도 없이 내 차 앞을 막는다. 그리고 내 차 안을 가득 메우던 음악 소리를 뚫고 들리는 땅을 파는 기계의 엄청난 굉음. 그제야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공사 중' 얼떨결에 앞에 선 사람의 안내대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접어들었는데 눈앞이 캄캄해진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 내 근무지인데, 도통 이 차를 끌고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것이다.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네비를 켜니 아주 좁은 길로 안내가 되었다. 차 한 대가 지나갈까 말까 한 건물과 건물 사이에 위치한 길이었다. 겨우겨우 통과해서 한숨을 돌리려는 찰나, 그 길 끝에서 내가 마주한 건 나의 근무지 앞 큰길 진입로를 막고 서 있는 소형차 두 대였다. 두 대중 한 대만 비켜주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어느 차주에게 전화할까 고민하며 서 있는 데 할머니 한 분이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오셨다. “내 차 빼주께” 한 마디를 남기고 운전석에 탑승하시는 할머니를 보며 한참은 기다려야겠구나, 하고 바라보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시동 부릉부릉, 뒤로 후진 빡, 우회전 깜빡이 켜고,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진 할머니의 차. 덕분에 무사히 출근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약 10분간의 엄청난 모험을 뒤로하고 사무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으니 마음이 씁쓸해진다. 실제로도 시력이 좋지 않아 얼굴에 거추장스러운 안경을 쓰고 있는 것도 모자라 내 사고(思考)에도 선입견이 덕지덕지 묻은 회색 안경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내 차 앞을 가로막은 차의 주인이 할머니라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부터 나는 “노인은 운전을 잘 못할 것이다.”라는 선입견에 지배당한 채 출근 시간을 못 맞추겠구나, 망했다라고 생각했다. 이 얼마나 편협적인 생각인가. 평소에 사람을 대할 때 소문이 발 빠르게 내 귀에 닿아도, 사람은 겪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늘 신중에 신중을 기했던 나였지만 여전히 특정 대상에게 쓰여있는 회색 안경을 벗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아주 사소한 것부터 사안이 중대한 것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회색 안경을 참 많이도 쓰고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들어봤을 “저는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어요.”라는 말에 각본처럼 짜인 “어머, 그럼 영어 잘하시겠네요.”라는 반응부터, 결혼을 해서 아이가 있는 여자는 가정에 신경 쓰느라 일에 집중 못 할 것이라는 생각도, 혹은 남자가 술을 좀 마셔줘야 사회생활을 잘하는 거라는 생각까지 그 수가 너무 많아 헤아릴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물론 그 바탕에는 실제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들이 점차 점차 굳어져 선입견으로 다시 태어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그렇기에 회색 안경을 벗지 않고 특정 상황에 있는 모든 사람을 바라본다면 일부 사람의 일생에 엄청난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가령, 일부 업체에서는 여전히 결혼, 출산 계획이 있는 여성 지원자들은 합격시키기를 꺼려 하고 규모가 큰 프로젝트는 남자 관리자에게 맡기는 게 관례가 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지금은 21세기다. 지금껏 선입견이 만들어지는 데 기여한 사람들에게 집중해왔다면 이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느 퇴근길, 또다시 우연히 마주친 할머니의 차는 여전히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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