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좋은 장소들
나의 좋은 장소들
  •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 승인 2022.03.10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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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 이야기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우리 동네에는 별별 사람이 다 살아요. 집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죠. 이상한 사람도 있지만 뭐 괜찮아요. 나에겐 좋은 친구들이 있으니까요.' 그림책 <마음의 지도/클라우지우 테바스 글(시)·비올레타 로피즈 그림/오후의소묘> 속 주인공이 혼잣말처럼 조곤조곤 독자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 좋은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글 속에는 없다. 회상하듯 말을 할 뿐이다.

모퉁이 집에 루시아가 살고, 옆집엔 알베르토가 살고, 점심 때면 함께 공을 차며 놀았던 기억들을 주저리주저리 얘기할 뿐이다. 친구가 많기는커녕 외려 쓸쓸해 보일 지경이다. 허나 시는 그 행간을 비집고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지 않은가! 행간을 보면 주인공이 친구들과 `우리 동네'라는 장소에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갖고 있는지 눈치 챌 수 있다.

`우린 서로 모르는 게 없어요. 아, 성만 빼고요. 알게 뭐예요. 이름도 가끔 까먹는걸요. 친구끼리 이름 같은 건 상관없어요. 어디 있는지 알면 되니까요.' 주인공에게 친구들은 그런 존재다. 이름, 나이, 집안 등의 겉치레는 하등 상관이 없다. 지금 같이 있지 않아도 괜찮다. 같이 보낸 시간과 함께 한 기억이 있는 장소들이 있으면 된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알기만 해도 되는 거다.

나, 그 마음 안다. 학창시절 친구들에 대한 마음이 그렇고, 큰아이 친구 엄마로 만난 친구가 그렇고, 독서 모임에서 만난 몇몇 친구들이 그렇다. 늘 내 마음속에 있는 친구들이다. 마음에서 친구들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면 그 끝엔 그들과 함께 했던 시절들과 장소들이 따라온다. 그 장소에 기억이 스며 있다. 우리가 함께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장소는 기억하고 있다. 그 시간과 기억 덕에 어제 만났어도 할 얘기는 산더미 같고, 1년 만에 만났어도 어제 만났었던 사이인 듯 주저함이 없다.

그린이도 그 마음을 아는지 `우리 동네'라는 장소성을 하루 일상의 동선으로 보여 준다. 집을 나와 학교에 가고, 학교 끝나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상에서 `친구와 장소'를 일치시키며 동네가 주는 특별한 성격을 보여 준다. `친구들이 없을 땐 장소만 남겨 친구를 장소로 대체하려 했다. 무언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게 하고 싶다'는 그녀의 말과 상통하는 대목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산다. 관계는 타인과 실낱같은 끈으로라도 연결되고 싶어 하는 욕구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완전한 고독을 자처하고 싶은 욕구가 공존하게 한다. 이 모두 장소가 주는 의미와 일치한다.

화가 비올레타 로피즈는 혼자 있는 주인공의 공간 멀찌감치에 친구들을 살짝 숨겨 놓았다. 독자로 하여금 안도감을 갖게 하려는 배려다. 쓸쓸함이 아니라 안정감 있는 관계의 범위 안에서, 마음속 친구들이 함께하는 장소에서 의도적으로 즐기는 고독이라는 것을!

나도 그려봐야겠다. 내 친구들이 살고 있는 내 마음속에 지도를 그려봐야겠다. 추억을 소비하고 기억 속에 살고 있는 기억들을 소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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