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초
13초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8.08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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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승 환 <충북민교협 회장>

13초였다. 하도 답답해서 시간을 재보고 나서 안 사실이었다. 아예 눈을 감고 명상을 하거나 저만치 떨어져 있는 난초를 바라보고 와도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마침 난초가 꽃을 피워서 함초롬한 수줍음을 선사하기에 지루하지 않게 13초를 넘길 수 있기는 했다. 하지만 13초는 상당히 긴 시간이었다. 숨을 쉬지 않고 있어 보기도 했다. 역시 긴 시간이었다. 13초가 이토록 긴 시간일 줄이야 누가 알겠는가 사실 13초도 빠를 때의 이야기다. 두 배인 26초가 걸릴 때도 적지않고 아예 작동 불능인 경우도 없지 않다.

13초는 내 연구실 컴퓨터의 화면이 한 번 바뀌는 시간이다. 독자제현께서 똑같은 상황을 상상이라도 해 본다면 이것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아실 것이다. 13초에 화면 하나가 바뀐다면 한 시간에 적어도 30번은 바꾸어야 하는 인터넷 사용 환경에서 무슨 정신수양(精神修養)이라면 모를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긴 시간이다. 사실 너무나 답답해서 컴퓨터를 던지고 싶은 때도 없지 않다. 도를 닦는 심정으로 13초를 견디다 보면 컴퓨터와 애증도 쌓인다. 도사(道士)가 된 심정으로 고물컴퓨터가 금도끼가 될 때를 기다리다가 약속 시간을 못 지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게 무슨 청승이냐고 힐난(詰難)할 분도 계실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컴퓨터를 앞으로도 5년은 더 사용할 계획으로 있다. 이 고물컴퓨터는 내 고물차와 아름다운 협조를 하면서 나를 괴롭히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나는 이 두 현대문명의 기기(機器)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다. 왜 그런가 복수를 하고 있으니까. 복수가 좀 이상하다면 탈주라고 바꾸어도 좋다. 물론 복수-탈주를 위선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요즈음 컴퓨터는 30만원만 주어도 1초 안에 화면이 넘어가는 정도의 좋은 것을 살 수 있다. 그러므로 학교 선생이 돈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제가 선택하여 즐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또 차로 말하면 그렁대는 이 12년 소형 고물차 또한 30만원을 들여야만 폐차가 가능한 고철이어서 청승과 오만이 합쳐진 설치미술의 지경에 이르러 있다.

그런 고난에도 불구하고 나는, 13초의 컴퓨터와 30만원의 차를 바꿀 생각이 없고, 또 핸드폰을 가질 계획이 없다. 왜 그런가. 나에게 핸드폰 없음과 13초와 30만원은 모두 자본과 과학기술의 연합독재에 저항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쯤해서 많은 분들께서는 그러면 컴퓨터도 사용하지 말고 차도 운전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는 냉소를 보내실 것이다. 맞다. 동시에 틀리다. 자본과 과학기술이 연합한 힘은 그야말로 막강하여 가히 무적(無敵)이다. 오늘날 그 어디에도 자본주의의 바깥은 없다. 자본주의라는 우주 속에 사는 21세기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전면 전쟁이 아니라 자본주의와의 부분적 대결이다. 자본은 과학기술과 연대하고 있는데, 그래서 생긴 제국(Empire)을 거부하는 것은 곧 세상에서의 격리를 뜻한다. 세상에서 격리되면 이 세상의 잘못을 고칠 수 없다.

한편 그처럼 느린 13초는 내가 인터넷이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탈출한 시간이다. 인터넷 속에서 유랑하는 현대의 인터넷 노마드(internet nomad)들은 접속이 되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언제부터인가 접속되어 있어야만 편안한 족속으로 진화했다. 사실 그 접속은 자본주의 세계화가 설치한 감옥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이제 핸드폰이나 컴퓨터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는 대신, 자기 스스로 근대의 감옥에 갇히는 것이다. 이 감옥에서는 단 한순간의 자유도 없다. 그런데 나의 경우, 13초 동안은 감옥으로부터 탈주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다시 수감되기는 하지만, 나는 13초 동안 자유를 얻는 것이다. 참으로 소중한 휴가다.

이 휴가도 없이 긴긴 시간을 감옥에 갇히는 형벌은 가혹하다. 그래서 나는 13초의 여유를 가지는 것이며, 30만원의 복수를 하는 것이고, 핸드폰 없음의 탈주를 하는 것이다. 이 저항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나로서는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당하면서 버티는 일종의 전투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반성 없이 자본과 과학기술의 계엄령에 복종할 수는 없다. 어떤 형태가 될지라도 존재론적 자유의 시간이 있어야 하기에,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복수-탈주를 꿈꾼다. 13초의 실존은 귀중한 복수이며, 30만원의 고물차는 치열한 나의 투쟁이고 핸드폰이 없음은 목숨 건 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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