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끝과 시작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3.08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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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

그야말로 역사적인 20대 대통령선거일을 앞둔 밤.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키의 <끝과 시작>을 읊조리며 잠 못 이루고 있다.

시(詩)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

나는 사전투표를 했다. 살아온 만큼 기억도 가물가물해 이번이 몇 번째 선거를 치르는 것인지 아삼아삼하다. 그동안 여러 차례 치른 선거이고, 투표이지만 이번처럼 떨리는 경험은 처음이라는 기억이 선명하다.

사상 유례가 드물 정도로 거대 정당의 두 후보의 선두다툼이 치열하거나, 시쳇말로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여야 하는 지배적 편견을 염려하는 것이 떨리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절체절명과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인식과 그에 따른 대처방식의 판단 기준이 과연 대한민국의 집단지성을 제대로 자극하고 있느냐에 있다.

아니 어쩌면 이번 20대 대선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부끄러움을 자유롭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 더 유효하다. 그러므로 부끄러움의 몫이 후보자와 그런 후보자를 내세운 정치집단이거나 휩쓸리고 있는 유권자에게 숨김과 보탬이 없이 온전하게 염치(廉恥)로 남게 될 것이냐를 걱정한다.

20대 대통령선거의 공식 선거 운동은 8일 자정으로 끝났다. 오늘은 후보자나 운동원들이 유권자를 직접 만날 수 없고, 확성기를 동원해 구호를 외치거나 로고송을 틀고 율동을 하는 `소리'를 낼 수 없다. 전투를 독려하고 내 편을 끌어 모으는 모든 `신호와 소음'은 잠잠해지고 깊은 사유(思惟)와 성찰로 마음을 채워 투표장에 나가는 고요한 떨림으로 채울 날이다.

선거운동의 `끝'은, 동시에 국민주권의 의무와 권리로 채워지는 `시작'을 의미한다.

그 `끝과 시작'에서 나는 `익숙함 그리고 새로움'을 생각한다. 내가 2013년 청주공예비엔날레의 주제로 제시했던 `익숙함 그리고 새로움'은 끊임없는 순회와 순환을 상징한다. 도구적 필요성에 의해 창조된 `새로움'이 편리하고 유익한 `익숙함'이 되고, 지나친 익숙함으로 싫증을 느끼면 다시 새로움을 창조한다는 불변의 연속성.

모든 시작과 끝은 온전히 사람들에 의해 구분되는 것.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이 하루의 시작이라면 잠이 들 무렵 하루를 끝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 해가 끝나면 누구나 새해를 희망과 기대로 시작하는 것처럼, 겨울의 `끝'을 봄으로 삼아 더 온화하고 빛나며, 더 가볍고 밝아질 것으로 부풀어 오르는 날을, 그리고 `나'를 소망한다.

모든 `시작과 끝'은 한 치의 틈도 없이 어김없이 맞물려 있는 것. 포효와 절규가 끝난 자리를 신성한 성찰과 사유를 통해 존엄한 참정권의 행렬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항상'멈추어 끊어지지 않는다.

다시 비스와바 쉼보르스키의 <끝과 시작>의 절창 한 구절. 「사진에 근사하게 나오려면/ 많은 세월이 요구되는 법./ 모든 카메라는 이미/ 또 다른 전쟁터로 떠나버렸건만/ (중략) 아직도 누군가는/ 가시덤불 아래를 파헤쳐서/ 해묵어 녹슨 논쟁거리를 끄집어내서는/ 쓰레기 더미로 가져간다. //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서서히 이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리.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 그보다 더 알지 못하는, / 결국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참과 거짓이 난무하던 시절은 끝나고 이제는 우리가 마침내 진실을, 그리고 역사의 궤적과 미래의 희망을 가려내야 할 시간.

극성을 더하고 있는 역병의 고난도 언젠가는 시들게 될 것인데, 다만 그 `시작'이 분명하지 않은 것처럼 그 `끝'또한 선명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의 모두 전과 후를 이어가며 살아야 한다.

끝내는 것도 우리의 몫이고, 시작 또한 스스로 찬란하게 할지어니.

다만 부끄러운 마음을 끝으로 새 역사를 시작하는 오늘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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