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 개뿔!
무소의 뿔? 개뿔!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03.0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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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현실의 핵심은? 타인(他者)과의 얽힘이다. 모든 게 마음이 짓는 거(一切唯心造)라는데? 모든 게 마음이 짓는 거라는 말은 사바세계를 떠나야 가능한 말이고, 사바세계의 중생은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세상에서의 내 삶은 타인이 찢어 갖는다. 와이프, 부모, 자식, 친구, 지인, 동료, 상사, 부하직원 등이 내 시간을 요구한다. 심지어는 나의 적도 내 시간을 요구한다.

그럼 내 시간은? 다른 사람들의 시간에 맞춰 살다가 짬이 나면 내 시간이다. 그 짬이 길 수도 있고 아주 짧을 수도 있다. 그 시간에 밀린 숙제라도 할라치면 그 시간도 내 시간은 아니다. 그건 사회생활의 연장일 뿐이다.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다른 사람들하고 어울려 살다가 아주 가끔 자신을 돌아보며 아쉬워하는 게 인간 삶이다.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람은 타인과 어울려 살게 되어 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지지고 볶으며 사는 게 인생이다. 인간은 인연에 매여(攀緣) 살게 되어 있다.

요즘에는 내 평생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매이지 않고 산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온전히 내 스케줄에 맞춰서 산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과의 얽힘에 내 삶을 할애하고 남는 시간이 내 시간이었다. 그렇게 마련된 내 시간도 부담스러워 일부러 약속을 만들기도 했다. 요즘은 나의 뜻대로 살다가 다른 사람에게 내 시간을 할애해주는 식으로 산다. 온전히 나에게 할애된 시간이 너무 긴데, 시간이 엄청나게 빨리 간다. 눈을 떴나 했는데 어느새 잘 때가 된다. 내 시간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약속이라도 생기면 그때부터 전쟁이다. 몇 시에 출발할까, 어떻게 가지? 장은 어디서 보지? 뭘 갖고 가야 하나? 무슨 말을 하고 놀지? 뭘 먹지? 몇 시에 끝날까 등등. 혼자 지내다 보면 다른 사람과의 약속은 한편으로는 설레는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담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은 잔잔한 연못에 작은 돌이 하나 던져지는 것과 같다. 연못의 잔잔한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깨지는 건 아니지만 파문은 전체에 미친다. 예전에는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정신없이 휩쓸려 다녔다면 이제는 한 사람 한 사람과의 만남이 예전과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고나 할까? 예전보다 훨씬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숱한 만남 중의 하나(1/n)로 치부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에는 사람을 만나면 유난히 즐거워지는 거 같다. 산과 집을 오가면서 삶을 돌이켜보는 걸 본업으로 하고 사람들과 틈틈이 어울리며 사는 그림도 나쁘지는 않다.

집과 산을 오가다 보면 욕심이 생기기도 한다. 몇 개월, 1년 정도를 아예 산속에 칩거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죽을래?”라는 집사람의 반문에 깨갱 하기는 하지만 속으로 `산속에 숨어버리면 지가 어떻게 할 거야, 찾을 수도 없는데'하며 내밀한 반란을 꿈꾼다.

산속 칩거는 나에게도 엄청난 결단이 필요한 사안이다. 산과 집이 어울릴 수 없음을 철저하게 느껴야 칩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집을 떠나지 않으면 칩거가 되지 않고 집을 떠나려면 모든 것과 결별(厭離)해야 한다. 이 과정을 부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자가 소리에 놀라지 않음과 같이,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음과 같이, 연꽃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음과 같이 혼자서 가라. 무소의 뿔처럼.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끄달리지 말고, 인간관계에 방해받지 말고 온갖 난관을 툭툭 털어버리면서 혼자 가야만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다 털고 칩거해야만 승부를 볼 수 있다고 하면 집사람 왈: 개뿔, 너는 지금으로부터 37년 전 내가 기회를 줬는데 그걸 못 살렸어. 이번 생에는 포기하고 그냥 나한테 봉사하면서 살아. 집에 반찬 떨어졌다.

난 이 글을 쓰고 음식 장만하러 집에 간다. 집에 가면서 나는 생각할 것이다. 포기해야 할까?

/충북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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