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투쟁의 초석 3·1운동 103주년을 맞으며
항일투쟁의 초석 3·1운동 103주년을 맞으며
  • 송만호 충북남부보훈지청 보훈과장
  • 승인 2022.02.24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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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송만호 충북남부보훈지청 보훈과장
송만호 충북남부보훈지청 보훈과장

 

올해도 코로나19 팬데믹이 지속되는 가운데 일제 식민지 시대 항일투쟁의 초석이 된 3·1운동 103돌의 뜻 깊은 기념일을 맞는다. 삼일절은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정부는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공포함으로써 국경일로 정하고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따라 공휴일로 정하였다. 이날에는 정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여 순국선열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올리며 민족정신을 선양하는 각종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독립선언서에 담겨 있듯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세계만방에 천명한 선열들의 불굴의 자주독립 정신은 우리 민족의 얼로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는 조선인유학생학우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독립청년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2·8독립선언이다. 이러한 해외 움직임을 알게된 손병희, 최린 등 천도교 측 인사들과 이승훈 등 평안도의 기독교계 인사들이 국내에서 독립선언을 계획하고 불교계의 한용운 등이 참여하여 천도교, 기독교, 불교 3대 교단이 주축이 되어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3대 원칙에 따라 독립운동의 전개 방향을 제시했다.

그해 2월 27일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배포되었고 고종의 장례일인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전국적인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으로 그 결과 일제의 무단통치가 끝나게 되어 민족해방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으며 민주공화제 이념이 전면적으로 보급되어 공화제 형태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될 수 있었다.

또한 이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 식민지에서 최초로 일어난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으로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알렸을 뿐만 아니라 중국 등 아시아 민족의 해방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인하여 독립쟁취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결국 전국적으로 운동을 지도할 조직이 없었다는 점, 처음 준비했던 33인이 일본,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가 독립을 선사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타협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민중의 투쟁을 끝까지 이끌지 못했다는 점은 이후 민족해방운동의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3·1운동 과정에서 끝까지 비타협적인 투쟁의 모습을 보여준 민중이 주체가 되지 않으면 해방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나아가 민중의 힘을 결집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독립운동과 그 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조직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조직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지역에서도 지속적인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국민 건강 등을 고려하여 여러 계기 행사가 아쉽게 취소되었다.

제103주년 3·1절 계기 기념행사 등이 모두 취소되었지만 이런 때일수록 선열들의 고귀한 나라사랑 정신을 받들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지역과 세대, 계층 간의 혼돈을 넘어 일치단결하여 코로나19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분열에서 화해로, 갈등에서 통합을 이루어 글로벌 세계무대에 우뚝 선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하여 모든 지혜를 모을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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