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키가 한 뼘 자랐다
부모 키가 한 뼘 자랐다
  • 추주연 충북단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 승인 2022.02.2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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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추주연 충북단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추주연 충북단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아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방 책상 위 편지 봉투의 행방을 묻는다. 지난 설 명절 오랜만에 만난 친지들이 제대를 축하하며 준 세뱃돈이 봉투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아들 방을 정리하며 며칠째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봉투를 버린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 머릿속이 까매졌다. 방 정리를 한답시고 책상 위 봉투를 버린 건 나다. 분명 내 실수인데 왜 아들에게 화가 나는 것일까? 뭐가 잘못된 것일까?

아들이 입대하기 전까지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름대로 자기 방을 치운다는 아들이지만 내 보기엔 늘 부족해 보여 시간 날 때마다 슬쩍 정리해 주곤 했다. 그때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일이 지금은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 건지. 그동안 아들을 향한 아쉬움이 켜켜이 쌓였던 것일까?

책상 위를 치우지 않는 것이 그렇게 못마땅한 일인가? 퍼뜩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자기 책상 하나 제대로 치우지 않다니 삶을 일구어 가는 과정을 소홀히 하는 건 아닐까 하고 그만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버린 것이다. 생각해보면 아들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데 정작 마음이 바뀐 건 나일지도 모른다. 그냥 두면 스스로 치웠을지도 모른다. 조급한 마음에 먼저 나서고는 혼자 아쉬워했는지도 모른다.

한바탕 세뱃돈 봉투 소동이 지나가고,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을 다시 펼쳐들었다. 내 속도가 아니라 아들의 속도를 지켜보자며 마음을 먹어보지만 아이를 있는 그대로 믿고 기다린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어쩌면 우리는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 가장 빨리 깨우치는 길이라는 루소의 말을 차근차근 익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아들이 뜬금없이 화투놀이를 하자고 한다. 도 닦는 심정의 엄마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결국 장모와 사위, 손주가 둘러앉아 이쑤시개를 걸고 판이 벌어졌다. 아들은 군대에서 갈고 닦은 실력의 타짜라며 큰소리를 쳤지만 점수 계산도 서투른 그야말로 초짜다. 그저 코로나로 답답하고 우울한 할머니를 위해 마음을 낸 것이다.

군대 있는 내내 잘 지낸다며 걱정 말라던 아들의 병영일기에는 힘든 날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1제대하고는 쉴 법도 한데 곧장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어느새 아들은 힘든 순간을 스스로 이겨내고 부모를 걱정하며 할머니를 챙길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있었다.

삶은 무엇을 하느냐의 두잉(doing)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의 비잉(being)이 아니겠는가? 세뱃돈 봉투의 행방은 여전히 찾을 길이 없으니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서야 부모 키가 한 뼘 자라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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