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을 깨고 나온 데미안
알을 깨고 나온 데미안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2.02.20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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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컨테이너 하우스 처마 끝에 주황색 몸통을 한 어미 딱새 한 마리가 분주히 오간다. 살짝 들여다보니 대여섯 개의 알이 깃털 드리운 둥지 안에 오밀조밀하다. 하늘 비구름이 심상치 않아 애면글면 바라보다 비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겨주는데 오십 미터 지근거리 숲속에서 다급한 새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어미 새인 것 같아 자리를 피했지만 새소리만 프레스토(Persto)로 흐를 뿐 둥지 쪽으로 날아오질 않는다. 그렇게 삼사일이 지나자 알에서 썩은 냄새가 났다. 자연은 그냥 자연 상태로 두어야 하는데 인간 중심의 해석과 간섭이 어린 생명의 목숨을 잃게 했다.

그 이후로도 컨테이너 하우스엔 벌집, 새집, 사마귀 알집 등 다양한 자연계의 집이 지어졌고 스스로 재건축돼 새 주인 드나드는 과정을 무심히 지켜보기만 했다. 다만 밭둑 가장자리에 해바라기를 줄지어 심고 참깨, 들깨 설렁설렁 거두며 흘려놓을 뿐이다. 어리석은 소견으로 자연의 원리를 오독하고 알을 깨고 나오려는 아기 새의 둥지를 해쳤으니 속죄하는 마음이다.

살면서 인간 중심의 판단이 빚은 오류가 이뿐이겠는가? 이원론적 원리로 평가한 주변의 세계, 자연의 세계, 어둠 저편의 세계를 다시 불러내어 헤아리니 아연실색한다. 한 치의 의심이나 비판 없이 기존의 세계 중심으로 학습한 것들이 비일비재하다.

농장 밭둑에 앉아 집에서 들고나온 『데미안』을 다시 펼쳤다. 몇 개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카인의 표식, 아브락사스, 알, 음악, 데미안'의 등등 상징적 것들에 방점이 찍혀있다. 오래전 여고 졸업반 때 읽은 책인데 대학에서 학생들과 토론할 부분들이 많아 1학기 토론 텍스트로 올렸다.

“새는 알을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새는 누구이고 알을 무엇이며 지향점인 아브락사스(Abraxas)는 무엇이고 사라진 데미안은 또 어떤 존재인가.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알을 깨고 세계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한 이상적 인물이며 싱클레어가 지향하는 무의식의 건강한 자기이다.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면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인물이다. 알의 세계를 벗어나 건강한 내면의 소리를 청종하며 자립해가는 삶은 니체적 사고이며 현실 세계의 자립을 강조하는 하이데거의 실존 사상이다.

데미안처럼 의식이 건강한 사람은 어둠의 세계, 악의 화신 크로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면 이미 그 누군가에게 자기 자신을 지배할 힘을 내주었다는 걸 의미한다. 의식이 건강한 사람은 알의 세계가 명령하는 가치에 무조건 순응하진 않는다.

이 고전은 싱클레어가 자아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소설로 보기도 하고 주인공이 세상에 병립된 선과악의 이원론적 코드에서 부딪히며 진정한 자기, 데미안을 찾아가는 실존 지향의 심리소설로 볼 수도 있다. 제목을 싱클레어가 아닌 데미안으로 설정한 것에서 그 답을 유추한다.

십 대 후반에 읽었을 때와 어느 정도 인생을 살고 여러 분야의 독서 이력을 세운 후 철학적 사유에서 다시 읽는 지금, 그 의미가 또 새롭다. 물론 자연을 바라보는 관조도 그렇다. 내게 자연은 알을 깨고 나온 알 너머의 세계이다. 이 자연에서 헤르만 헤세를 통해 건강한 데미안을 만나고 자연이라는 데미안이 길 튼 진리를 읽는다. 자연은 가공이 없는 무봉의 세계이다. 자연이 보여주는 섭리에서 각 존재자의 존재를 그대로 간섭 없이 읽는 큰 세계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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