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俗家)의 하루
세상(俗家)의 하루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02.16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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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진다. 댓 시간 자면 잠이 깬다. 새벽부터 일어나 요가, 참선 명상을 한다. 요즘은 명상하면서 많이 다잡아졌는지, 생각이 일어날 조짐을 미리 파악해서 그런지 많이 좋아졌다. 그럼에도 졸음은 여전히 강적이다. 무심히 자신을 들여다보노라면 어느새 생각의 끈을 놓치고 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절에서와 달리 아침 예불을 하지 않으니 편하게 일과를 시작한다.

명상을 끝내면 출출해진다. 밑간해서 썰어놓은 돼지고기, 썰어놓은 신 김치를 넣어 볶고 끓인다. 한소끔 끓여 비지, 김칫국물을 넣고 끓이면 맛있는 비지찌개 완성. 고등어 굽고, 김 자르고, 밑반찬 꺼내면 훌륭한 집 밥 한 상이다. 식사 후 훤히 트인 벌판을 바라보며 커피에 위스키 한 방울 떨어트린다. 향이 좋다. 절 생활에 비해 호사스럽다.

단단히 챙겨 입고 둘레 길을 걷는다. 그간 개발한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코스를 골라 걷는다. 발걸음을 센다. 하나, 둘, 셋… 일곱, 하나, 둘…일곱. 여전히 가벼운 전쟁을 한다. 걷고 나면 개운하다. 너무 꽁꽁 싸매고 걸어서 등에 땀이 흥건하다. 간단한 샤워 후, 점심으로 칼국수 한 그릇 순삭.

점심 후 소파에서 티브이를 보다 보면 어느새 졸고 있다. 늙은이의 졸음? 모양이 좋지 않다. 박차고 일어나 글도 쓰고 인터넷도 뒤진다. 집사람이 어느새 방에 들어와 “영감!”하고 부른다.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가고 수다를 떤다. 원래 말수가 없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혼자 지내며 외로워서 그런지 착 달라붙어서 쉴 새 없이 재잘댄다. 들볶이다 한마디 한다. “나이가 들수록 혼자 살아야 돼. 나한테 의지하지 말고 혼자의 삶을 개척해. 나처럼 요가, 참선을 하든지.”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영감이 있는데 내가 왜 그래야 돼. 귀찮더라도 참고 견디며 들어, 그리고 시키는 대로 해.” “내가 종이야?”라는 반발은 “그럼 종이지”라는 공격에 무력화된다. 말을 말아야지. 평생 지은 죄가 많으니 속죄 차원에서 확전을 자제한다.

세상(俗家)의 삶에서 탈속(脫俗)하는데 가장 큰 화두는 아내다. 집사람 때문에 집(俗家)은 산사(山寺)가 될 수 없다. 두 번째 넘어야 할 산은 티브이이다. 소파에 앉아서 쉬다 보면 아무런 걸림 없이 익숙하게 리모컨으로 손이 간다. 티브이는 켜기가 불찰이지 일단 켜면 끄기가 어렵다. 재미없으면 다른 채널로 넘어가고 재미있으면 한두 시간 후딱 간다. 내용에 빠져 생각을 하면 생각에 골이 생기니 명상에 장애가 된다. 유익한 프로도 생각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큰 장애다.

티브이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나 밖의 대상에 생각이 가게 한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다. 참선 명상은 내 안의 생각을 없애는 것이고 그건 나를 없애는 작업이다. 그런데 티브이는 나를 전제하고 그 나를 나 밖의 대상으로 향하게 한다. 나 밖의 대상으로 향하면 내 머리는 어떻게 될까? 티브이를 한두 시간 보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대상에 매몰되어 머리가 둔탁해진다. 술을 먹어서 의식이 몽롱해지거나 도박에 빠져 의식이 흐려지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다.

참선 명상을 하면 머리가 맑아져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해진다. 나의 판단능력을 마비시켜 외부대상에 매이게 하는 생활습관과 이런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의 판단 능력 자체의 정당성을 버리는 일은 같을 수가 없다. 참선 명상과 티브이 시청은 상호 모순되는 일이다. 누구나 경험하지만 너무 익숙해서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 현대인의 티브이 시청이다. 참선 명상은? 길을 찾기가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것보다 어렵다. 어떻게 될까? 자연히 티브이가 이긴다.

마누라와 티브이(他者)가 집(俗家)에서의 내 삶을 지배한다. 세상에서의 하루는 타자와의 얽힘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고 산사의 하루는 나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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