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이정표를 보다
여행에서 이정표를 보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8.03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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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희 진 회장 <환경과 생명 지키는 교사모임>

길이 있다. 길은 사람을 이끈다. 길 위에 선 이는 먼저 길 안내 표지를 보게 될 것이다. 그 중 화살표는 아주 단순한 안내 표지다. 화살표는 그것을 본 사람을 그 어느 쪽이든 나아가게 만든다. 길은 아직 끝이 아니며, 더욱 머무를 곳, 집이 아님을 그 화살표가 지시하기 때문이다.

언제인가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집에서 벗어나는 법을 익히기 위해 길 위에 들어섰다. (처음에 길은 집에 이르는 길이었음을 돌이켜보라.) 길을 떠난다는 말이 쓰이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것은 오래된 집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새로운 집에 이르려는 이에게 더할 나위없는 자기 사슬로부터 해방의 길떠남이기도 했다.

여행이 사람의 삶을 가르고 바꾸는 중요한 임계가 된 것이다. 여행은 직접 겪는다는 점에서 다른 무엇보다 교육의 효과를 인정받았고, 따라서 여행자에게서 배우고자 했다. 여행자는 길에 들어서자 먼저 확인한 화살표지에 따라 과녁에 꽂히는 화살처럼 마침내 자신만의 여행을 떠났다.

특히 다른 누구보다 '모든 것이 남성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남성 본위의 조선사회 제도 아래에서 여성을 너무나 남성의 부속물로만 여기는'(나혜석) 가부장 사회의 억압 속에서 '안방구석에만 갇혀 있던' 여성에게 길 위에 선다는 것은 회한과 감동이 어우러지는 일생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여정에 오른 여행자는 누구랄 것도 없이 먼저 자유를 느꼈다. '혼자 이렇게 길을 떠나 차 안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과 이웃해 앉거나 마주 앉는다는 것은 신경이 피로하지 않아 좋고, 또 마음대로 내 생각을 달릴 수 있어서 좋다.'(노천명) 이어 그는 여자에게 씌운 생물학적 성을 넘어 그것이 인간의 여행임을 선포한다. '그러나 나 자신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오 척여 촌의 작은 몸뚱이 하나 속에다 이 세상을 모조리 정리하여 축적하려는, 그리고 나 스스로를 '소(작음)'에 붙잡히지 않는 인간을 만들려는'(백신애) 욕망을 드러내며, 여행이란 이렇듯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도 1920, 30년대 일제치하에서의 여행, 그 길떠남이란 사뭇 내적, 외적 피압박 설움을 어떤 식으로든 극복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발화시킴을 어찌 탓하랴 당시 여행, 다른 의미로 망명에 버금가는 탈출의 기회는 각자에게 자신과 이웃과 민족의 처지를 놓고 벌이는 교육의 이데올로기적 효과의 양면성을 쉬 드러내기도 했다. 그 결과 '국내외를 막론하고 우리 민족의 처지는 좋지 못하고, 당하는 고생 또한 거의 마찬가지이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 그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김마리아) 웅변하기도 하고, '남보다 크게 한다는 그 배경에는 돈이라는 것이 있다. 돈! 돈의 힘이 아니면 유지할 수 없는 것이 이 나라(미국)이다. 구멍도 없는 금전에 눈이 가려진 자들은 이것을 모르지만, 돈에 미치지 않은 사람과 올바른 기상으로 정의롭게 살아가려는 사람 눈에는 이 사실들이 명백히 보일 것이다.'(허정숙) 비판하기도 한다.

세월이 흘러 오늘 우리는 떠남 대신 여행을 즐긴다. 그럼에도 그 여행 메모에 무엇을 으뜸으로 기록해야 할까 무엇보다 여행은 그럴수록 아직 모르는 세상에 오롯이 절하는 경배가 되어야 한다. '사람은 어떻게 살까 이것은 실로 알기 어려운 문제다. 더욱이 나의 견식, 나의 경험으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면서도 돌연히 동경되고 알고 싶었다.'(나혜석) 그리하여 나는 또 다른 화살표지판을 여행길에서 본다. 어느 쪽이든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령하는, 그렇게 자꾸만 심신을 부풀려 키우는 식민제국의 화살이 아닌 다른 화살표지. 그것은 분명히 하나로 모아져 '나'를 가리키고 오히려 자연인 '내 집'에 머물 것을 가리키는 오래된 이정표인 것을 다시 본다. 어떤 과녁이든 실수가 없는 내 안의 화살로 떠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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