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주장
데스크의 주장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8.03 23: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살라딘의 관용
권 혁 두<부국장(보은·옥천·영동)>

지금은 불귀의 객이 된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 십자군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던 술탄 '살라딘(Saladin)'이다. 그와 같은 이라크 티그리트 출신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후세인이 살라딘을 존경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 받으려고 노력했다면 종말이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살라딘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생전의 후세인이 화학무기까지 동원해 대량학살을 시도했던 쿠르드족 출신이다. 14살에 객지인 이집트에서 군에 입대해 승승장구한 끝에 파티마 왕조의 재상에 올랐다. 쿠데타로 왕좌에 오른 그는 북아프리카와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아우르는 아이유브 왕조를 창업하고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살라딘이 역사에 남는 위용을 발휘한 것은 십자군의 3차 원정(1189∼ 92년)때다. 이 전쟁에서 그는 약탈자로 전락한 십자군의 오만과 탐욕에 일격을 가했고, 사자왕으로 불리던 영국왕 리처드를 궁지로 몰아붙인 끝에 화친을 제안하는 초라한 군주로 격하시켰다. 살라딘이 역사의 평가를 받는 것은 십자군을 물리치고 88년만에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한 그의 무용 때문만이 아니다. 살라딘의 진면목은 승자로서 적에게 보여준 관용과 도량에서 드러난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은, 무슬림은 물론 그들을 도운 유대인들까지도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성지를 파괴했다. 돌대신 이슬람 교도의 머리를 베어 투석기에 사용했고, 유대인들이 예배중인 교회를 봉쇄하고 불을 지르기도 했다. 전쟁에 동행했던 한 신부는 "예루살렘의 광장마다 잘려진 머리와 팔다리가 산을 이뤘고, 도시의 벽이란 벽은 물론 기사의 말 고삐까지도 피로 붉게 물들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오죽했으면 지난 2000년 교황이 900여년 전의 십자군 만행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칙령까지 발표했을까. 사자왕 리처드 역시 전쟁에서는 사자가 아니라 광폭한 이리에 불과했다. 살륙과 파괴를 주도하고 주머니 챙기기에 급급해 프랑스 왕과 전리품을 놓고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반면 예루살렘을 되찾은 살라딘은 기독교도에 대한 일체의 약탈과 살인을 금지시켰다. 약간의 몸값만 지불하면 방면했고, 몸값이 없는 사람에게는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실제로 형의 뜻에 감복한 살라딘의 동생이 돈이 없는 기독교도 1000명의 몸값을 대납하고 풀어줬다고 한다. 한창 전시에 적장인 리처드왕이 열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약과 얼음 등을 구해 보냈다는 유명한 일화도 전해진다.

개인적으로 살라딘은 '코란이냐, 죽음이냐' 양자택일을 강요하며 이교도들을 위협했다는 서구의 날조된 이슬람 문화를 단번에 떨쳐냈던 인물이다.

원수를 용서한 살라딘의 행적은 포용적 종교관을 내포한 코란의 정신이기도 하다. 코란은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진리는 암흑속에서도 구별되리라'며 이교도에 대한 관용을 설파하고 있다. 살라딘은 다른 종교에 의연하면서도 자신에 차 있는 이 이슬람 정신을 실천한 것이다.

지금 전세계의 이목이 아프가니스탄에 집중되고 있다. 이미 2명의 억울한 희생이 있었고, 21명이 끔찍한 공포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고 있다. 그들은 전시에 사로잡힌 포로도 아닐 뿐더러, 아프간정부 동조자도 친미주의자도 반 이슬람주의자도 아니다. 도움이 되려는 순수한 선의를 품고 아프간을 찾은 민간인들이다. 인류애에 반하는 이 무모한 질주가 중단되지 않으면 또 다른 증오만 탄생할 뿐이다. 마호메트는 '남에게 미소를 보이는 것조차도 선행이다'고 했고, '정의를 행하는 한 시간은 기도하는 일백시간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도 했다. 마호메트의 선행, 정의와 함께 900여년 전 유럽을 부끄럽게 했던 살라딘의 관용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부활하길 기대해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