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누아르의 메시지
르누아르의 메시지
  • 장민정 시인
  • 승인 2022.02.0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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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장민정 시인
장민정 시인

 

새해 벽두부터 신문을 장식하는 신춘문예 당선작 발표는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신문마다 당선작들이 쏟아졌지만 나는 가슴 두근거리며 읽던 시절이 그리울 정도로 언제부턴지 시들하고 시큰둥하다.

문단에서는 우리나라 시문학의 침체기라고 하기도 하는데 침체기를 넘어 빙하기에 진입한 느낌이 든다. “이건 시고 저건 시가 아니야? 은유가 있어야 시고 없으면 시가 아니라고? 그럼 예수님은 시인이야? 한글 막 깨우친 할머니들이 쓴 시는 시가 아니라며 딴죽 건 문단 선배 그 선배는 시인이야?”

한겨레 신문 `시인의 마을'에서 최진영의 시를 읽다가 그래,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요즘 시들, 뭐야! 복잡다단한 세상 탓인지 아니면 쌍끌이 작전 때문인지 내가 바라보는 시의 세계도 뒤죽박죽 깊이를 잴 수 없다. 신문과 잡지들에 활자화되어 나오는 시들을 보면 알 수 없는 암호를 읽는 것처럼 답답하다. 차라리 서정적 감동의 도가니에 빠지게 하던 50여 년 전의 시인 공화국 시절이 그립다.

시류를 끌고 가는 문단의 대선배 시인들이 다투듯 부추긴 말들은 하나같이 이미지를 통해 변주되는 시상은 신선해야 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독특함이 빼어나야 하며 진술은 비유를 넘어 은유들이 반짝반짝 빛나야 하고….

그러다 보니 너도나도 금맥을 캐듯 이미지 속을 헤엄치다 이미지 더하기 이미지, 이미지들이 꼬리 물기를 하다가 새끼줄처럼 비비 꼬여서 마침내 시인 자신마저 해독이 불가능한 시가 양산된다. 시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이다. 시인은 넘쳐나고 시들은 쏟아져도 시를 사랑하는 독자가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김소월, 한하운, 백석이 시대가 그립다. 그들은 르네상스 시인공화국의 재상들이지 싶다. 오, 하느님. 컴퓨터 앞에 앉아 넋두리를 쏟아내다가 잠시 고개를 들고 우러르는 시선이 붙잡는 벽에는 모 제약회사 로고와 함께 르누아르 그림이 있는 달력이 붙어 있다. 여인과 아이가 함께 있는 르누아르의 그림, 따뜻하고 풍요롭고 부드럽고 포근한 안락이 거기 있다.

문외한인 나도 좋아하는 르누아르. 그러나 메시지도 사상도 철학도 없다며 세속적이고 통속적인 삼류 그림쟁이라고 소외된 적이 있다 한다. 아마 대중적인 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믿는 예술 지상주의자들의 지론일 것이다. 그런데도 르누아르는 그런 말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세상은 불쾌한 일 투성인 걸 작품마저 어둡고 불쾌한 것을 창조할 이유가 없다”라며 자신의 화풍을 끝내 고집했다던가?

그런 고집은 좋게 말해서 개성이고 독자성이 되어 암울하고 비극적인 주제로는 한 번도 붓을 들지 않은 유일한 화가로 역사에 르누아르. 그가 남긴 6000여 점이라는 많은 작품은 책을 읽는다거나, 춤을 추거나 피아노나 목욕, 파티장 등등, 하나같이 여인과 아이가 등장하는 소소한 행복의 풍속도들이다.

하물며 굳어진 손 때문에 손가락에 붓을 묶어서 그림을 그리던 늙고 병든 시절에도 그의 화풍은 변하지 않았다니, 어쩌면 르누아르는 화가의 명성을 좇기보다 고단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을 우선했는지도 모르겠다. 예술은 모름지기 인간적이고 따스해야 할 것, 새해 벽두 르누아르의 메시지를 가슴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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