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던 달나라를 빼곡히 채우려면
어둡던 달나라를 빼곡히 채우려면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2.01.26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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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그날도 우린 방바닥이 지글지글 끓는 이불 속에 다리를 묻고 앉아 두런두런 책 이야기를 나누었다. 삶은 달걀과 꼬마김밥으로 저녁 허기를 채우고 최근 자신이 읽고 감명받았던 도서들을 꺼냈다. 나는 요즘 하루 1 작품 내 방에서 즐기는 유럽 미술관 투어라는 부제로 이용규 외 네 명의 작가가 풀어쓴 『90일 밤의 미술관』을 읽는 중이라서 무엇보다 그림책에 관심이 컸다. 그중에서 황 평론가가 추천한 시 그림책 『보름달』은 빨리 읽고 싶은 마음에 그 자리에서 주문을 넣었다.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난 언제나 노란 달과 온갖 별 무수히 깜박거리는 밤하늘이라고 말한다. 보름달은 넉넉해서 좋고 초승달은 여백 있어 좋아한다. 꼭 수집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아마도 달 그림일 것이다.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밖에 책이 도착해 있다.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집어들곤 곧장 서재로 향했다. 외출할 때 입었던 원피스 복장 그대로다. 성인 문학을 하지만 아동문학은 내게 최고의 휴식처이며 말끔히 피로를 풀어주는 상큼한 비타민이다.

`봄날, 깃털에 싸인 민들레 씨가 둥둥 달에까지 날아갔어요. 여기저기 민들레가 번지며 노란 꽃을 피웠어요. 어둡던 달나라가 환해졌어요.'

박방희 시인의 시 그림책은 『보름달』의 전문으로 세 줄 문장이 전부이다.

그러나 시 그림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무한대로 열려 있다. 칠흑 같은 도심 속 작은 소년이 노란 가방을 메고 어둑어둑한 길을 걸어간다. 소년이 작은 모퉁이에서 발견한 민들레꽃씨, 앙증맞은 입으로 후~후하고 불 때마다 회색빛 도시 공간에 별이 뜬다. 민들레 꽃씨는 슬레이트 지붕에 별처럼 피어나고 콘크리트와 밋밋한 벽돌 사이에도 노랗게 피어 삭막한 도심을 밝힌다. 흰둥이가 무심코 올려다본 창가에도 폐지를 리어카 가득 싣고 가는 노인의 머리에도 노랗게 피어난다. 집 앞 골목의 가로등에도 로드킬(roadkill) 당한 어미 노루의 몸에도 내려앉아 노란 꽃, 노란 별로 피어나고 뜬다. 그렇게 피어난 것들이 달까지 날아올라 어둡던 달나라를 빼곡하니 채운다. 민들레꽃으로 가득한 보름달은 팝콘처럼 부풀어 올라 여기저기 무수한 별을 만들어낸다.

가슴 따뜻하게 적셔주는 보름달의 여운이 깊다. 소년이 될 것인가. 민들레 씨로 퍼질 것인가. 자기 왕국 경영만 잘해도 건강한 시민으로 잘사는 길이라고 했던 내가 처음으로 창문을 닫고 대문 밖 세상에 관심을 두게 한 이정표로의 책이다.

갈수록 마음속 등불이 스러지는 중이다. 점점 심기가 어둡고 불편한 건 내가 사는 이 세상이 점점 알곡보다 가라지가 많아지는 까닭이다. 종교나 정치 모두 매한가지다. 그 자본주의적 탐욕과 권력에 눈먼 이리들, 정의는 실종되고 도덕성은 이미 박제가 된 상태고 사람들 사이엔 마치 그것이 주체사상처럼 집단무의식화되어간다.

교육 밖 세상은 이렇듯 도덕성이 결여된 카오스적 혼돈이다. 올해는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해이다. 요란스레 덜컹거린다면 빈 수레임을 의심한다. 품은 덕이 많은 사람은 강풍에도 흔들림 없이 묵묵히 제 세계를 지향한다.

오래 잡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창문 활짝 열어 밤하늘을 본다. 소년이 민들레꽃으로 가득 채운 보름달이다. 올해는 제발 화려한 말 장식 없이도 후미진 곳에 피어 있는 민들레꽃 하나에 눈을 걸며 꽃씨를 후~후 불어 날릴 줄 아는, 도심 속 불 꺼진 창문 앞을 서성이며 걸음을 멈춰 볼 줄 아는 그런 이들과 보름달을 채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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