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혹은 멀리 있는
가까운 혹은 멀리 있는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1.25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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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2500년 전 춘추전국시대 중국 초나라.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떠나는 백성들의 행렬이 날마다 이어지니 인구가 갈수록 줄어들고, 이에 따라 당연히 세수가 줄어드니 나라 전체가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초나라 제후 섭공이 답답한 나머지 공자에게 물었다. “날마다 백성들이 도망가니 천리장성을 쌓아 막을까요?” 공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근자열 원자래(近者說 遠子來). 여섯 글자만 남긴 채 표표히 떠나갔다.

근자열 원자래(近者說 遠子來). `가까운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서도 사람이 찾아온다'는 뜻의 여섯 글자는 `사람 중심 창조적 도시재생'이라는 슬로건을 만들 때 기조로 삼은 `아포리즘(경구)'이다.

도시재생뉴딜사업(주거지지원형)이 진행되고 있는 청주시 내덕1동의 올해 도시재생에 대해 `내덕에 심다 우리가 뿌리다'를 자문, 제안했다.

제안 공모 과정에서부터 주민들과 공감 했던 `내덕에 심다'는 청주농고가 포함된 마을의 특성을 감안해 새로운 경작(cultivate)의 희망을 다지는 의지가 담겨 있다.

`우리가 뿌리다'는 원형질과 근본, 원주민을 상징하는 `뿌리(Root)'와 `spread` 즉 확산되다, 퍼지다, 퍼뜨리다, 번지다, 유포시키다는 의미를 포함한 '뿌리다`의 중의적 개념이 담겨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을사람이 무조건 즐거운 도시재생이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즐겁고 기쁜 마을이라면 다른 동네 사람들이 부러워할 것이고, 멀리 있는 사람들의 그런 부러움은 내덕1동을 찾아오게 만드는 호기심을 불러올 수 있다.

문재인정부 대선 1호 공약으로 주목받았던 `도시재생'이 하릴없이 5년을 지내고 있다. 구호는 거창했으나 개발독재시대부터 상처 깊은 골수는 치유되지 못했고, 원도심의 부활은 여전히 요원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한 것은 있다. 다만 그 변화가 물리적인 것에 치중되었으며, 그러므로 공기(工期)를 채우는데 급급한 방식의 한계를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민주도'가 강조되는 도시재생뉴딜사업에는 대부분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거점공간'이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이 `거점공간'을 어떻게 쓸 것이고, 얼마나 즐겁고 기쁜 공간으로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준비는 충분하지 않다.

새로 짓거나 옛 것을 단장하거나의 차이를 가릴 것 없이, `공간'이 `인간'에 우선되는 경우는 없어야 한다. `인간'이 보듬거나 어우러지지 못하는 `공간'은 빈집이 될 것이고, 그런 악순환의 도시재생은 의미가 없다. 사람은 자꾸 떠나는데 천리장성 짓는 것만을 생각하는 2500년 전 초나라 관리 섭공과 다를 게 없다.

비단 도시재생만이 아니라도 때는 바야흐로 근자열 원자래(近者說 遠子來)의 시절이다. 멀리 있는 자식들을 기다리는 부모들은 벌써 다섯 번의 명절을 겪으면서도 애타는 마음만 더 가까이 있다. 물리적으로 멀리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처지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심정적으로 더 가까이 있음을 실감할 수 있도록 부디 서로 듣고 말하는 법이라도 기억해야 한다.

내일(27일)부터 <중대재해처벌법>이 본격 시행된다. 비록 상시근로자가 5인 이상인 사업 또는 사업장에 제한적으로 적용되지만, 먹고 살기 위해 출근한 길이 죽음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비극이 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일터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는 일은 근자열(近者說), 가까운 사람들도 즐거울 수 없고 멀리 있는 사람도 오지 못하게 하는 단절과 쇠락의 길이 될 뿐이다.



「멀다를 비싸다로 이해하곤 했다/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정말 먼 곳은 상상도 어려웠다」<박은지. <정말 먼 곳>. 부분>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정말 가까운 곳은 벗어났다'는 시인 박은지의 탄식처럼 가까운 것도, 먼 곳도 애처로운 세상.

유배지에서 받은 새해 편지에 `뽕나무 수백그루를 심으라'고 답장하는 다산의 마음은 가까운 기쁨과 먼 곳의 반가움. 환난의 종식은 멀고 그래도 설날은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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