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명 자 수필가
  • 승인 2022.01.1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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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새해 첫날이다. 아들네 가족이 나란히 서서 절을 하고는 손주가 선물상자를 내민다. 뚜껑을 열어보니 용돈을 모아서 샀다는 양말 두 켤레, 장갑 두 켤레, 마음을 담은 편지 카드가 들어 있다. 남편과 나는 마주 보고 웃으며 장갑을 꼈다. 손에 꼭 맞는다.

올겨울에는 한파가 밀려와도 우리 도훈이 덕분에 걱정 없겠구나. 하면서 장갑을 벗자, 녀석은 쭈글쭈글한 내 손을 잡는다. 손등의 피부를 당겨보고 밀어 보더니 제 손을 포개도 본다. 통통한 제 손과 주름진 할미 손을 번갈아 보며 어루만진다.

나는 오늘 그동안 별 관심을 주지 않던 손을 바라보았다. 손마디는 나무의 옹이를 닮았고, 뻣뻣해진 손가락은 붓기로 인해 꽉 움켜잡을 수가 없다. 손끝에 감각이 무뎌져 잡은 물건을 떨어뜨리는 일은 예삿일이 되었다.

거칠어진 손은 긴 세월 동안 집 안 구석구석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아내로, 며느리로, 두 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손은 그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그뿐이랴, 궂은일에는 달려가 위로하고 힘을 보탠 것도 손이다.

유년 시절, 할머니 품을 떠나 아버지 집으로 온 지 2년째 되던 해다. 손에 얼음이 박혔던 때가 있었다. 몹시 춥던 그해 겨울, 마음이 시린 것만큼 손이 시렸다. 열댓 살 무렵 집안일을 돕던 언니가 열 명이 넘는 식구들의 뒷바라지가 힘이 들었던지 아무도 모르게 가출해 버렸다. 그 언니가 하던 일이 오롯이 내 차지가 되었다. 쉴 틈 없이 바쁜 일상이었다.

빨래와 부엌일을 마치고 방에 들어오면 손이 발갛게 붓고 물집이 생겼다. 몹시 가려워 나도 모르게 긁고 나면 상처가 덧났다. 새어머니가 동생들을 위해 준비해둔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동화책 속으로 밤마다 여행하며 힘든 시간을 견뎠지만, 손에 박힌 얼음은 지금도 상처로 남아있다.

한때 이 손은 어려움에 처한 집안을 씩씩하게 일으켜 세운 적도 있다. 반석 위에 놓인듯 했던 남편의 사업이 너무 큰 밑그림으로 얼마 못 가서 높은 벽에 부딪혔다. 다시 일어서 보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몇 년을 어렵게 버티다 빚만 안은 채 접어야 했다. 그때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두 눈을 보고 손 놓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기술은 부족했지만, 결혼 전에 취득해 놓은 미용사 자격증을 내 걸고 용기를 내어 미용실을 열었다.

8년 동안 쉬지 않고 손은 노력하고 수고했다. 그 덕에 우리는 제자리를 찾았다. 억세고 볼품없는 손이지만 가족을 위한 사랑의 증표였다.

지난 삶을 돌아본다. 길고, 짧은 터널들을 빠져나오느라 가슴앓이로 보낸 밤도 여러 날이었다. 그 터널에서 벗어나기까지의 수고를 칭찬하며 투박한 손을 주물러본다. 이제는 글쓰기와 책 읽기로 지나온 삶에 대한 보상의 시간이라도 보내는 것만 같다. 깊은 겨울밤에 책장을 넘기다 차가워진 손을 따듯한 이불 속에 묻는다.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할미의 손을 어루만지는 손주의 손은 희망이다. 손주의 앞날에도 여러 빛깔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손주가 내 나이쯤 되었을 때 문득 제 손을 통해 지난 삶을 돌아보며 깊은 상념에 잠길 날이 있을까. 그럴 날이 온다면 제 손을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으면 하는 것이 할미의 바람이다. 그 미소는 자신의 삶이 만족스러울 때 나오는 표징일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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