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을 걷다 - 다시, 기본이 바로서는 세상
눈길을 걷다 - 다시, 기본이 바로서는 세상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1.11 19: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한 밤중에 눈이 내린 날, 새벽 산책길의 상념은 보통 때와 다르다.

세상은 아직 어둡고 아무도 먼저 간 흔적이 없어 첫 발자국을 남길 때, 심장이 두근거리는 그대는 아직 충분한 청춘이다.

눈 내린 벌판 한 가운데를 걸을 때 (踏雪野中去)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不須胡行)

오늘 내가 걸어 간 이 발자국이 (今日我行跡)

뒤 따르는 이에게 이정표가 되리니 (邃作後人程)

서산대사가 남긴 법문이 저절로 떠오르며 전인미답의 눈길을 걷는 일은 신비로운 경험이니, 그만큼 사는 일에 신중해지고 있는 중이라 하겠다. 일부러 뒤돌아보지 않는 한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잘 모른다. 아무도 가지 않은 눈길일지라도 내 자취를 일일이 확인하면서 걷는 일은 흔치않다.

맨 먼저 걷는 눈길일지라도, 그 길이 전혀 새로운 길이 아님은 누구든 깨닫고 있다. 그러므로 눈길의 첫 발자국은 그저 허상일 뿐, 날이 밝고 눈 녹으면 무수히 걸어도 흔적은 좀처럼 남지 않는 포장도로가 우리에게 더 가까운 실체이다.

아주 살짝 사방을 덮은 눈길을 걸으며 불현듯 나는 `함부로'라는 낱말에 목메고 있다. 「`함부로' 걷는 눈길」이며, 「`함부로' 걷어 찬 연탄재」, `함부로' 키워왔던 욕심과 `함부로' 대했던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함부로' 희망했던 코로나19의 종식에 이르기까지, 그동안의 우리는 `근본'을 얼마나 무시하며 살아 왔는가.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3차 백신까지 맞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돌리는 기나긴 역병과의 대치 속에서도 인류는 여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인류가 도대체 왜 `근본'을 파악하는데 이토록 게으름을 피우는지 의심이 생길 지경이다.

2022년 새해에 대한 기대가 아무리 간절하다 해도 `근본'에 대한 성찰과 사유 없이 전진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눈 내린 새벽길을 걸으며 `다시, 기본이 바로서는 세상'에 대한 상념이 깊어지는 이유도 `근본'에 대한 목마름에서 비롯된다.

2022년으로 해가 바뀌어도 인류는 3년 째 바이러스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재난의 한 복판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리적 거리두기는 아직도 적절하고도 피할 수 없는 대처 수단으로 남아있고, 멀리 있는 만큼 `함께' 극복하자는 의지로 옅어지는데, 재난 이전의 소소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못한 채 언제까지 우리가 버틸 수 있겠는가.

`근본'과 `기본'은 서로 같지 않다. 전자는 `사물이나 생각 등이 생기는 본바탕'을 말하고, 후자는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가장 먼저, 또는 꼭 있어야 하는 것'을 뜻한다. `근본'은 인간에 의해 `함부로' 흔들릴 수 없고 흔들려서도 않되는 절대적 명제이며, `기본'은 인간의 신념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바로 세울 수 있는 실천의지에 해당된다.

이 모든 재난은 반드시 지켜야 할 `근본'을 망각한 채 `함부로' 경계를 허물고 질서를 파괴하는 인간의 오만함을 응징하기 위한 강력한 경고일 것이다. 3차 백신에서 그치지 않고 4차, 5차, 6차로 거듭 되풀이 될지라도 바이러스의 흔적을 남기는 포장된 대응 끝에 그나마 익숙해지면 인간은 금방 `재난'의 절박한 순간을 잊어버릴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인간은 진정으로 각성하여 백신의 미봉책 대신에 바이러스의 `근본'에 대한 탐구를 서둘러야 한다. 그 `근본'을 바탕으로 `기본'이 바로 서고 `기본'에 충실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코로나19 재난 이전의 소소한 일상으로의 되돌아감을 추구하는 대신 차라리 재난 이후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아가는 희망이 더 바람직한 때가 아닌가.

`근본'이 무너진 세상은 뿌리째 사라질 것이다. 그 `근본'은 `기본'을 바탕으로 하니, 다시 `기본'을 바로 세우는 것이 곧 세상을 살리는 일. 눈은 어느새 녹아 흔적조차 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