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달
눈과 달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1.12.27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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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동지도 지나 겨울이 깊을수록 추위도 강도를 더해가고, 이에 따라 산야의 풍광들도 더욱 삭막하게 느껴진다. 소나무나 대나무 같은 상록수도 있고 동백과 같은 겨울꽃도 있다지만, 이것들만으로 삭막함을 감당하기는 어렵다.

겨울의 삭막함을 일거에 덮어 버리기로는 눈만 한 것이 없다. 화사한 봄꽃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순백의 눈이야말로 겨울 천지 모두를 뒤덮는 거대한 꽃 무리이다. 이 거대한 꽃 무리를 배경으로 하늘에 나타난 달은 환상의 조합으로 겨울 미학을 성취해 낸다.

조선(朝鮮)의 시인 장유(張維)는 눈과 달이 연출하는 겨울의 장관을 감상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눈과 달(雪後詠月)

片月今宵白(편월금소백) 조각 달 이 밤에 밝으니
千峯暮雪晴(천봉모설청) 모든 봉우리 저녁 되어 눈 그쳐 개었구나
乾坤都瑩澈(건곤도형철) 하늘과 땅 모두 밝고 맑으니
蟾兎轉分明(섬토전분명) 두꺼비와 토끼 모습 점차 분명해지네
泉室潛蛟泣(천실잠교읍) 샘물 방에 잠긴 교룡이 울고
林栖睡鵲驚(임서수작경) 숲 둥지에서 잠든 까치 놀라서 깨었네
桂宮寒透骨(계궁한투과) 월계수 궁전은 추위가 뼈를 뚫고
孀獨羿妻情(항독예처정) 항아는 홀로 후예의 아내로서 정리를 지키고 있네


시인이 기거하는 곳은 주변이 온통 산이다. 한겨울 산골에는 낮 동안 내내 눈이 내리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그치고 날이 맑아졌다. 산마다 하얗게 눈이 쌓여 빛나는데, 그 위로 달빛이 더해진다. 그래서 시인의 눈에는 눈 내리던 낮보다 달 뜨고 눈 쌓인 산이 더 밝아 보인다.

모처럼 삭막함과 쓸쓸함을 잊게 해주는 눈부신 겨울 풍광에 시인은 넋을 잃고 빠져든다. 하늘과 땅은 사물의 구분이 사라진 채, 온통 밝고 맑기만 하다. 시인의 관심은 자연스레 하늘에 뜬 달로 옮아갔다. 달의 전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하나 둘 시인의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까지 먼 곳이 보이는 것은 달과 눈 덕에 밤이 그만큼 밝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시인의 너스레가 보통을 넘어도 한참 넘는다. 두꺼비며 토끼에 교룡과 까치 그리고 남편인 후예의 불사약(不死藥)을 훔쳐 달에 들어간 항아(孀娥)까지 시인의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삭막한 겨울 분위기에 막혀 있던 시인의 상상력이 눈과 달이 만든 화사한 풍광 덕에 되살아난 것이리라.

겨울은 춥고 삭막하고 쓸쓸하다. 간혹 보이는 상록수들의 푸름과 산야에 쌓인 눈의 하야 빛이 겨울을 견디는 사람들에게는 큰 위안이다. 아무리 춥더라도 눈 내리고 달 뜬 겨울 밤에 동네 고샅이라도 거닐며 겨울 정취를 즐기는 것을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서원대 중국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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