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희망의 깃발을 올린 한봉수 의병장
민족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희망의 깃발을 올린 한봉수 의병장
  •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 승인 2021.12.20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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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헤이그 특사 사건에 따른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은 의병운동에서 전면적인 의병전쟁으로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과서에서는 이를 `제3차의병', 또는 `정미의병'이라고 부른다. 1907년 8월 5일 원주진위대봉기는 제천의진 재정비로 귀결되었다. 이강년을 비롯한 박여성, 조동교, 김상태 등은 원주진위대 해산에 즈음하여 휘하의 병력을 거느리고 제천으로 들어왔다. 이날이 8월 13일이다. 이때 제천으로 들어온 의병진은 40여 부대에 달할 정도로 대단한 기세였다. 연합부대는 8월 23일을 기하여 충주성 공략 계획을 세웠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일본군 보복은 너무도 잔인하였다. 의병의 근거지이자 주민들이 의병을 비호한다는 이유로 민가를 모조리 불사르는 초토화 작전에 돌입했다. 맥켄지는 당시 상황을, `거리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서 펄럭이는 일장기가 선명하게 보였고, 일본군 보초의 총검은 또한 빛났다. 나는 말에서 내려, 잿더미 위를 걸어서 거리로 들어갔다. 이렇게까지 완전히 파괴된 것을 이전에 본 일이 없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번화했던 거리였는데, 그것이 지금은 시커먼 잿더미와 타다 남은 것들만이 쌓여 있을 따름이었다.'라고 적었다.

이제 제천이라는 도시는 지도 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와중에도 충북인의 의병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괴산과 청주, 청안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 한봉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20~30명 소규모 대원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여 신식무기를 노획하고 스스로 무장하여 일본군을 위협하였다. 특히 심리전에도 능통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는데, 이는 일제의 기록에 충청도 `토벌대상자'로 한봉수만을 언급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한봉수 의병장이 이끈 의병부대의 특성을 5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평민으로 구성된 20~60명 단위의 소규모 부대라는 점이다. 둘째는 1907년부터 1910년까지 후기 의병전쟁 전 시기에 활동했다. 셋째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동한 사실이다. 넷째는 민중들 사이에서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다섯째는 유격전에 능숙한 점이다. 특히 공격 대상자를 포함한 투쟁유형은 일본인 자산가와 친일파 처단, 밀정과 변절자들을 처단하였다. 이들은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실시하여 우편 행랑을 기습하여 군자금을 모았다.

독립군은 지역 주민과 유대를 강화하여 장기적인 항전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아울러 독립운동사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부분은 연해주 지방의 의병부대와 연계를 도모하였다는 사실이다. 나라가 망하는 시점에서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모색한 사실은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후 충북인의 해외에서 무장투쟁은 이러한 역사적인 연원에서 비롯되었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이름도 빛도 없이 희망의 깃발을 올리며 헌신하신 의병들의 무장 투쟁은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결국은 광복의 기쁨으로 결실할 수 있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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