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소나기
12월의 소나기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1.12.19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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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겨울의 나무가 나목으로 서 있다. 뿌리를 깊이 박고 몸을 움츠려 바람을 견딘다. 잎이 트고 꽃이 피는 봄. 나무가 겨울을 견디는 이유다. 두근두근 화사한 희망을 품는다. 견뎌야 더 단단해진다고 바람은 불어대고 비는 뿌려댄다. 속절없이 젖는다. 봄을 핑계로 혹독한 수행을 강요받는다. 나무는 묵묵히 서서 긴 고행에 든다.

겨울엔 나도 동안거를 보내려 한다. 추위가 무서운지라 사람 만나는 일도 줄이고 외출도 쉰다. 코로나 덕에 일부러 애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칩거하게 된다. 나뿐이 아니라 질병이 사람들에겐 겨울이다. 춥고 삭막한 시간이 그들을 안에 가두고 있다. 어쩌면 비우고 욕심을 털어내라는 자연이 주는 경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수행을 하라는 무언의 암시일지도 모른다.

나의 동안거는 무산이 되었다. 제주에 있는 우리 세컨하우스를 가고 싶다는 친정 오빠들의 성화에 못 이겨 계획을 잡기로 했다. 실시간 예약으로 올라온 렌트카에 클릭을 하면서 시작된 일이다. 일명 먹튀라고 하는 인터넷 사기를 당한 것이다.

조금 싸다고는 생각했지만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 지금껏 인터넷으로 잘 해왔으니 말이다. 예약 후 일주일이 지나 문자가 왔다. 렌트카 업체는 대행업체로부터 입금이 되지 않아 취소한다고 했다. 뭔가 잘못 온 문자려니 대수롭지 않던 생각이 점점 불안으로 변했다. 확인해보니 사기가 분명했다.

여태 살면서 처음 겪는 일에 당황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있나 싶어 인터넷을 열어본다. 업체를 밝힌 사기를 당한 사람들이란 글자가 눈에 확 들어온다. 단톡방에는 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렌트대금도 천차만별이다.

순식간에 칠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 사람들도 나와 똑같은 처지라 위로가 된다. 누구는 경찰서에 사기죄로 고발하고 왔네, 카드사에 이의 신청을 했네 하며 의견이 많았다. 단톡방을 만든 방장은 자세히 설명해주고 자료도 정리해주어 많은 이들이 거기에 동참했다. 나도 카드사에 이의 신청을 제기했다.

또 어떤 이는 인터넷에 올리고 어느 이는 기사도 냈다. 뉴스로 여러 방송을 타고 세상이 떠들썩하도록 조치를 한 그들 덕분에 먹튀 업자는 도망갈 틈이 없었는지 어떻게든 책임을 지겠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시간이 흐르자 하나, 둘 카드사에서 결제취소 승인 문자를 받았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차츰 그 수가 늘더니 탈퇴 회원이 불어난다.

남아있는 회원이 줄면서 서운해야 하지만 기쁘다. 나도 기대가 생긴다. 반으로 줄도록 아무 소식이 없자 몸이 안달을 내기 시작했다. 입안에 콩알 만한 하얀 반점이 생겨 무얼 먹어도 아프고 쓰라리다. 참다못해 병원에 가니 무슨 신경을 썼느냐 묻는다. 노코멘트로 처방전을 받았다. 이렇게 애를 태우고 이틀이 지나서야 카드사로부터 반가운 문자가 도착했다. 양손을 벌려 쾌재를 부른다.

단톡방을 만든 방장은 여자 친구와 제주도에 놀러 가려고 예약을 했다고 한다. 사기를 당하자 그녀가 당하고 바보처럼 가만히 있느냐는 말에 개설하였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될 줄 몰랐다며 놀랐다는 것이다. 여럿이 일궈낸 좋은 결과에 뿌듯하다는 말로 고마움을 전했고 회원들은 결집 될 수 있는 방을 열어준 데 깊은 감사를 전했다. 모두가 서로서로 토닥이며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문을 나오는 순간, 하늘에 선명한 무지개를 보았다. 곱기가 환상적이다. 낯선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희망의 고리로 이어져 만들어진 찬란한 무지개. 그 일곱 빛이 눈부시다. 12월에 때아닌 된 소나기가 지나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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