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하늘의 저녁 눈
강 하늘의 저녁 눈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1.12.13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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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길거리를 나뒹굴던 낙엽들마저 자취를 감추고, 나무들의 앙상한 가지에는 찬 바람만 요란하다.

삭막한 겨울 풍광에 쓸쓸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 주는 것을 꼽으라면, 단연 눈일 것이다.

고려(高麗)의 시인 이인로(李仁老)도 겨울 눈의 매력에 푹 빠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강 하늘의 저녁 눈(江天暮雪)

雪意嬌多著水遲(설의교다저수지) 눈은 어여쁘게 느릿느릿 강물에 닿고
千林遠影已離離(천림원영이리리) 온 숲에는 먼 그림자가 벌써 어른거리네
蓑翁未識天將暮(사옹미식천장모) 도롱이 쓴 노인은 아직 날 저물려는 걸 모르고
醉道東風柳絮時(취도동풍유서시) 취하여 말하길, 봄바람에 버들 꽃 날리는 때라 하네.

겨울에 내리는 눈에는 두 가지 속성이 있다. 몸에 닿았을 때는 차갑다는 것과 눈으로 보았을 때는 하얗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추운 겨울에 눈이 차가워서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겨울에 사람들이 눈을 좋아하는 이유는 눈의 색깔 때문이다. 눈의 색인 백색은 빨강 노랑과 같은 꽃의 색들에 비하면, 화려하지 않게 보일지 모르지만, 봄의 매화와 벚꽃, 여름의 장미 그리고 가을의 국화까지 흰색은 결코 화려함에서 밀리지 않는다. 그 화려함을 주변이 온통 삭막한 겨울에 만난다면 그 느낌은 훨씬 강렬할 것이다.

시인은 춥고 삭막한 겨울 저녁에 강가를 거닐다가, 생각지 못한 광경을 접한다. 강 위의 하늘에 하얀 꽃이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눈이었는데, 교태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강물에 일부러 느릿느릿 내려앉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주변 모든 산들의 먼 그림자도 이미 희미해졌다. 저녁에서 밤으로 접어든 것이다. 그런데도 강에는 도롱이 쓴 노인이 그대로 앉아 낚시에 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노인은 이미 술에 취해서 그런지,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버들 솜이 날린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겨울 눈은 화려하다. 교태롭기가 봄 벚꽃 못지않다. 그래서 술에 취한 이들 중에는 눈이 오는 것을 버들 솜이 흩날리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춥고 삭막한 겨울 저녁, 강가를 거닐다 만난 흰 눈은 미리 앞당겨 보는 봄꽃이나 다름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서원대 중국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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