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장미
12월의 장미
  • 김기자 수필가
  • 승인 2021.12.0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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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기자 수필가
김기자 수필가

 

달력의 마지막 장이다. 아파트 담장을 휘감고 있는 장미가 아직도 의연하다. 겨울의 문틈에서 추위를 잘도 버티어 가고 있다. 잎을 거의 다 떨궈낸 가지에는 한 때 왕성했던 가시가 저만큼에서도 선명하게 보인다. 꽃잎의 빛깔조차 색다른 가운데 듬성한 몇 송이에서 생명력을 느끼고 있음은 왜일까. 어쩌면 애처로움까지 동반되어 있는 현재 상황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래도 여전히 곱다. 마지막까지 내려놓지 않고 버텨내는 붉은빛을 보며 사람과 대비가 되기 때문이다. 누구든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이 그와 같지 않을까 하는 짐작마저 한다. 한편, 여느 꽃과 달리 강한 모습에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에 이르렀다.

장미를 닮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만큼 삶은 자유롭지도 녹록하지도 않은 현실이었다. 아름답고 우아함에서 멀어져가는 저 장미의 현재를 비교하며 나를 위로하는 마음마저 생겨나는 거였다. 그것은 살아온 시간에 대한 최선이었음을 고백하는 의미라고 해도 부끄럽지가 않다. 비록 낡아가는 인생일지언정 삶의 열정을 장미에서 발견한다고 해도 지나침은 아니리라.

결혼해서 지금껏 생활전선에서 뛰어야 했다. 가끔은 내려놓고 홀가분해지고 싶은 때가 왜 없었겠는가. 참 많이도 견디며 살아왔다고 혼자 중얼거리는 일이 잦은 편이다. 그러나 추위와 맞서고 있는 장미를 보며 그런 생각을 품는 것도 현재의 내 모습에 대해 작은 만족함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시선을 당기고 있다. 순간적으로나마 닮고 싶었던 욕망이 남은 생의 바탕에 어떻게 작용할지 조심스럽다. 다만 건강한 의식으로 나를 이끌어가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검은 머리는 아주 드물어진 현실일뿐더러 아직은 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입장이지만 장미의 끈질김을 거울삼아 살아가겠노라는 다짐이 일고 있다.

걸어온 인생길보다 걸어갈 길이 짧다는 걸 인식한다. 12월의 장미가 그것을 여실히 표현하고 있다. 이제 더한 추위가 밀려오기 마련일 터이고 장미도 스러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나름대로 기품을 잃지 않은 채 생명을 소중하게 지켜내는 모습이다. 가슴에 새롭게 날아드는 메시지로 여기고자 한다. 또 하나의 그림이 되고, 귓전에 남는 음악이 되어 내게 남은 시간을 꽃처럼 귀화시켜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지금의 내 나이, 문득 들여다보니 여성이라 하기에는 밋밋할 만큼 닳아버린 형상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화들짝 놀라면서도 가슴 저 밑에 내재 되어 있는 조그만 꿈의 조각들을 찾고야 만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지내왔던 세월이었다. 이제 단 하나라도 꺼내어 다듬고 키우는 일에 몰두하리라. 삶의 의욕이 상실되지 않도록 날마다 자신에게 많은 것을 주문하고 어루만지는 습관에 젖어 들어가리라.

언젠가는 우리네 인생도 소리 없이 사라져갈 것이다. 하지만 오늘 끝까지 주어진 생을 지켜가려는 장미에서 큰 의미를 찾게 되었다. 부족한 열정으로 살아가는 나를 12월의 장미가 발길을 붙잡아 놓고야 말았으니 그 여운에 취해 세상이 온통 새로울 뿐이다. 언젠가는 내 삶이 끝자락에 이른다 해도 침착히 여기며 들여다볼 거울을 발견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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