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마을 사람들이 만든
의자, 마을 사람들이 만든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12.07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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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입동(立冬)을 한참 지나 대설(大雪)이 되었는데도 날은 춥지 않았다.

마을 한 귀퉁이에 놓인 `의자'에서는 오히려 봄날 같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다.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에나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 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라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이정록, <의자>

청주시 내덕1동 17통 조그마한 빈터에 긴 의자 2개가 새로 생겼다.

볕이 좋은 이곳은 심심한 이 동네 노인들이 즐겨 나와 해바라기를 하는 곳이다.

이 의자는 마을 사람들이 손수 만들어 놓은 것인데, 소일거리 없는 노인들에게 안성맞춤이다.

도시재생뉴딜사업 주거지지원형의 사업이 진행 중인 내덕1동 사람들은 주민역량강화사업의 일환으로 목공교실을 함께 수강했다. 처음에 마을 사람들은 전문 강사의 지도로 요즘 한창 유행인 도마를 비롯해 양념 진열장, 의자 등 개인용품을 주로 만드는 배움의 삼매경에 몰입했다.

그러다가 17통 통장의 제안으로 여럿이 사용할 수 있는 의자를 만들기로 의기투합했다. 이곳은 평소에도 동네 어르신들이 자주 나와 말동무를 하며 정을 나누던 곳인데, 의자가 없어서 아쉬웠다. 이웃과 말벗을 하며 외로움을 덜고, 밤새 안녕에 안도하던 곳에 머물기 위해서는 집에서 의자를 힘겹게 들고 나와야 했던 고난이 해결된 셈이다.

의자를 만들면서 마을 사람들은 `나'와 `내 것'만의 좁고 닫힌 가슴을 열어 비로소 외롭고 고단한 이웃에게로 향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공동체'로 마음이 열리고 넓어진다.

`의자'는 편안한 휴식의 도구이자, 영역의 표시이기도 하다. 권위를 상징하거나 일생의 노고를 위로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일생에 대한 기억이면서 외롭고 지친 다른 사람에게 쉬어갈 수 있는 넉넉함이 되기도 한다.

오는 15일부터 사흘간 문화제조창에서 제6회 도시재생한마당이 열린다. 건물을 새로 짓거나 단장하고, 도로를 정비하는 등 물리적 공간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나는 도시재생의 근본은 이런 변화에서 비롯되는 일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소박해도 더불어 정겨운 도시」가 가장 오래 지속되는 `미래'가 될 것이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많은 도시가 가장 부러운 삶의 터전이 아니겠는가.

청주시 내덕1동 17통 좁은 빈터에 나란히 놓인 의자 두 개는 밤이나 낮이나 누구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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