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돌로 만든 상석에 숨겨진 비밀
붉은 돌로 만든 상석에 숨겨진 비밀
  • 박종선 충북문화재연구원 기획연구팀장
  • 승인 2021.12.05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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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박종선 충북문화재연구원 기획연구팀장
박종선 충북문화재연구원 기획연구팀장

 

단양군 가곡면 보발리 산촌에 위치한 성금마을에는 단양에 유일한 시묘막이 남아 있다.

시묘막을 지은 사람은 성금마을에 살았던 故 김기선(1903년생)으로,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며 살고 있었다. 그러다 모친이 80세로 돌아가시자 매우 슬퍼하며 묘소 곁에 움막을 짓고, 1964년부터 무려 2년 8개월을 이곳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현재에도 묘역에는 시묘막과 묘지, 상석, 향로석이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 상석과 향로석이 특이하게도 붉은 돌로 만든 것들이다. 일반적으로 상석을 붉은 돌로 만들지는 않으며, 필자가 알고 있는 한 붉은 돌로 만든 상석과 향로석은 이곳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이곳에 붉은색의 상석과 향로석을 만들게 되었을까?

그 힌트는 상석의 명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석에는 묘소의 주인과 상주에 대한 기록과 함께 좌측 끝 부분에 제작자에 대한 내용이 남아있다. 명문의 마지막 “충남 보령군 대천면 화산리 신중혁 근정(忠南 保寧郡 大川面 化山里 申重赫 謹呈)”이란 내용으로 제작자가 보령군 대천면 화산리에 사는 신중혁 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화산리는 현재 충남 보령시 화산동으로, 우리나라에서 벼루(남포벼루)로 가장 유명한 지역이자 현재도 벼루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충남 보령군 청라면과 바로 인접한 곳이다.

단양의 무형문화재인 자석벼루장 신명식 역시 보령군에서 넘어온 분으로, 두 지역의 인연은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다.

단양 자석벼루장 신명식의 집안은 선대부터 보령에서 벼루를 제작하던 집안으로, 그의 형 역시 벼루장(경기도 무형문화재)이다. 신명식의 부친의 함자는 신권우로, 일제강점기 말 신권우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강제징용을 당해 단양에 있는 광산으로 끌려가 거기서 캐낸 돌로 벼루를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 때 끌려갔던 지역이 단양 어느 곳인지는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지만.

신권우는 강제징용에서 돌아올 때 그곳에서 만든 조그마한 자석함을 가져왔고, 항상 이곳에 동전을 넣어 놓고 자녀들에게 용돈을 주곤 했다고 한다. 이후 아들인 신명식과 신근식이 아버지가 일했던 단양 자석산지를 찾아다녔고 천신만고 끝에 자석산지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석을 가져와 부친에게 보여드리자, 과거 자신이 다루었던 돌이 맞다고 확인해주었다고 한다.

다시 돌아와서, 자석으로 된 상석을 제작한 신중혁과 신권우가 동향 출신임을 고려해본다면 두 사람이 함께 단양 광산으로 징용당한 것은 아닐까 추론해 볼 수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자석으로 상석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신중혁이 자석에 대한 중요성과 석제가공 기술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단양 성금마을에 살던 김기선이 단양 보발광산으로 징용 온 보령사람들과 어떠한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이들이 자석을 다루는 기술을 가졌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묘소를 조성할 때 일반적인 석제를 이용하여 상석을 만든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귀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자석으로 상석을 만들고 그때까지도 알고 지내던 신중혁으로 하여금 제작토록 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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