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나그네
영원한 나그네
  • 장홍훈 세르지오 신부 양업고 교장
  • 승인 2021.12.02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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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장홍훈 세르지오 신부  양업고 교장
장홍훈 세르지오 신부 양업고 교장

 

`21번가' 12월 마지막 달, 수능을 마친 양업고 21기 졸업생들이 뒷산에 닦아 놓은 산책길의 이름이다. 서두를 것도 없이 허리를 펴고 머리를 곧게 세우며 21번가를 걸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학우들이 누군가가 닦아 놓은 길을 걸어왔듯이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길을 닦아 놓은 21번가의 길, 선생님이 닦아 놓은 길을 학우가 걷고, 그 학우가 성장해서 새로 닦아 놓은 길을 스승이 걷는다.

그 길 위에서 `순례자'의 노랫말이 떠올랐다.

`인생은 언제나/ 외로움 속의 한 순례자/ 찬란한 꿈마저 말없이 사라지고/ 언젠가 떠나리라// 인생은 나뭇잎/ 바람이 부는 대로 가네/ 잔잔한 바람아 살며시 불어다오/ 언젠가 떠나리라// (중략) 인생은 언제나/ 주님을 그리는가보다/ 영원한 고향을 찾고 있는 사람들/ 언젠가 만나리라'

길은 어느 종교에서나 중요한 상징이다. 사람 자체가 끊임없이 길을 가는 나그네와 같기 때문이다. 길은 목표이고 삶의 방향이다. 때론 목표에 이르는 길은 멀고 꼬불꼬불하다. 둘러가기도 하고 잘못 들기도 하며 험하거나 좁은 곳을 지나기도 한다. 보이는 길이 있는가 하면 전혀 보이지 않는 길이 있다. 그래도 발걸음을 멈춰선 안 된다. 다른 사람이 걸었든 안 걸었든 자기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군인은 군인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나름의 길을 걸어야 한다.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의 `사람의 길'에 나오는 이야기다. 제자가 달관자인 스승에게 물었다. “하느님을 섬기는 보편적인 길을 하나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달관자가 대답했다. “사람들에게 어느 길로 가라는 말은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배움으로 섬길 수도 있고, 기도로 섬길 수도 있는가 하면, 단식이나 반대로 먹음으로서도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살펴 길을 택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으나, 나아가는 길들은 각자 다르다. 한 가지로밖에 섬김을 받을 줄 모르는 하느님이시라면 그게 무슨 하느님이겠는가!”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이면 누구나 유일무이한 길을 가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그 이전에 있던 적이 없던 새로운 존재이고, 각자 자기를 실현하도록 새로운 길로 초대받았다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길'을 따르는 자들이라 불렸다(사도 9, 2).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 역시 새로운 길을 나서는 이들로 묘사되고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별을 따라 길을 나서는 나그네와 같다. 이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이기도 하다. 또한 요한복음 사가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가는 길이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는 삶은 그래서 하느님께 도달한다. 하지만 이 길이 편안한 길만은 아니다. 십자가의 길이 될 수도 있다.

시인 박노해는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라고 한다.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슬퍼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삶에서 잘못 들어선 길이란 없으니/ 온 하늘이 새의 길이듯/ 삶이 온통 사람의 길이니// 모든 새로운 길이란/ 잘못 들어선 발길에서 찾아졌으니/ 때로 잘못 들어선 어둠 속에서/ 끝내 자신의 빛나는 길 하나/ 캄캄한 어둠만큼 밝아오는 것이니'

사람의 생은 늘 길을 나서는 영원한 순례자와 같다. 이 세상에 잘못된 길은 없다. 길은 누군가에겐 치유이고 희망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꿈을 꾸게 한다. 오늘 하루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새로운 길이다.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루카 13,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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