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김장
따뜻한 김장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11.30 19: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김장은 긴-마음이다.

입동을 지나 소설을 앞둔 11월 어느 날, 난생처음 직접 김장을 했다. 물론 나 혼자 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오로지 내 가족을 위한 것도 아니다.

내덕동 밤고개에 도새재생을 통해 문화 예술의 거리로 탈바꿈을 준비하고 있는 공간이 있고, 그 뒤편에 마을 사람들이 푸성귀를 부쳐 먹던 빈 텃밭이 있다.

공사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청주시의 부지매입이 완료되면서 `경작금지'를 알리는 경고문이 을씨년스러웠다. 마을사람들과 의기투합해 이 빈터에 배추며, 무, 갓, 쪽파 등을 심은 것은 폭염이 한창인 지난여름이었다.

마을사람들의 자생적 공동체 조직 <내덕에 심다. 마을관리 협동조합> 조합원을 중심으로 동네사람들은 땅을 그냥 놀리지 말고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키우고 있었다. “주민들이 직접 배추와 무를 길러 김장을 하고, 그 김장으로 마을의 어려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자.”는 내 제안에 마을사람들이 흔쾌하게 동의하면서 판은 벌어졌다.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림 같은'(?) 농사일이 아니었다. 꽤 오랫동안 비워둔 땅은 황폐하기 이를 데 없으며, 건축 폐기물과 마구 버린 쓰레기가 뒤범벅이다.

텃밭을 구경만 하던 마을사람들의 옷소매가 하나둘씩, 저절로 걷어 올라가고, 하필 늦여름 비가 내려 후텁지근한 날 배추와 무, 쪽파와 갓의 모종과 씨앗을 심었다.

농사일과 담을 쌓은 지 족히 몇십 년은 지났을 도시의 마을사람들은 어설프게 뿌려 놓은 김장거리가 제대로 자라고 있는지 걱정하며 텃밭에서 자주 조우하기도 했는데,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김장은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야 세월이 좋아져서 절임배추를 사다가 그저 버무리기만 하면 되는 줄 알겠지만, 직접 농사를 지은 배추와 무가 김장으로 단장되기까지의 과정은 보통 고된 일이 아니다.

마침내 때가 되어 김장하기로 한 날. 텃밭에서 무탈하게 자란 배추와 무, 쪽파와 갓은 파는 것만은 못했지만, 그런대로 잘 자라 주었다. 수확을 하면서 맛본 생배추 노란 속살과 흙만 털어내고 한 입 베어 문 무의 맛은 기분 좋은 달큰함이다.

무와 배추를 거둬들이고 이를 깨끗하게 씻는 일, 그리고 소금에 절여 하룻밤을 삭히는 일은 요즘 김장에서는 절임배추를 사는 일로 대체되면서 생략된다. 그런데 이 일도 보통 일은 아니다. 300포기가 넘는 배추를 옮기고 씻고, 소금에 절이고 다시 씻는 일을 반복하는 일은 온몸의 삭신이 쑤실 만큼 힘들다.

그 사이 무와 갓과 쪽파 등을 채 썰고, 새우젓과 고춧가루에 버무리며 김치속(표준어는 김칫소)을 만드는데, 이때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알맞은 농도로 풀을 잘 쑤어야 하는 일이다.

하룻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마을사람들이 임시로 사용하고 있는 <내덕에 심다. 마을관리 협동조합>사무실에 모였다.

배추에 속을 버무리는 일은 마을에서 손맛 좋기로 자자한 중·장년 여성들의 몫이고, 남정네들은 씻어 놓은 배추 몇 포기를 옮기느라 공연히 서성거리다가 이내 심드렁해져 따끈하게 삶은 돼지고기 수육에 막걸리 추렴을 하면서도 “김장독 묻을 땅을 파야 하는데…” 심심한 빈말을 하면서 세월을 핑계 댄다.

청주농고 키 큰 느티나무에 걸린 초겨울 짧은 해가 빈 가지에 얽히지 않고 서둘러 서쪽 하늘로 달음박질칠 때쯤 되어서야 김장이 끝났다.

직접 농사를 지어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되풀이한 마을사람들의 김장은 서른 개의 통에 나누어 담겨 나눔의 길을 찾아 흩어졌다.

식구들 저녁밥상을 차리기 위해 흩어지는 마을사람들의 모습이 이파리를 내려 논 큰 나무를 닮았다. 수십 번 찬물에 씻은 배추가 넉넉한 겨울나기가 된 긴- 하루.

처음과 끝을 함께 한 마을사람들의 더운 가슴으로 올겨울 김장은 뜨겁다. 12월에도 사람들은 춥지 않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