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곰이어도 괜찮아
불곰이어도 괜찮아
  • 신은진 한국독서심리상담학회 회장
  • 승인 2021.11.25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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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 이야기
신은진 한국독서심리상담학회 회장
신은진 한국독서심리상담학회 회장

 

15년 전 가족이 모여앉아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가족 구성원을 그리고 싶은 동물로 표현하는 그림 검사이다. 남편은 자신과 아내를 사슴으로 표현했고 아이들을 연못 속 물고기로 그렸다.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싶어 하는 남편의 마음이 그림에 담겼다. 그때 큰아이는 엄마를 사자로 표현했다. 아이가 경험하고 있는 엄마에 대한 마음과 생각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집에서 최고 권력자이기도 했고 무섭게 아이를 다그쳤던 엄마를 상징하는 동물이 사자였다. 상징으로 표현된 나와 직면하는 것은 힘들지만 아이가 지각하는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불곰에게 잡혀간 우리 아빠(허은미 글·김진화 그림)'는 엄마를 불곰으로 생각하는 아이의 시선으로 쓰인 그림책이다. 아침마다 불곰에게 쫓겨 후다닥 밥을 먹고 후다닥 옷을 입고 후다닥 집을 나서는 아빠와 아이의 그림을 보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아이는 힘이 세고 목소리가 큰 엄마는 불곰 같고 재미있게 놀아주는 아빠는 사슴 같은데, 둘은 어떻게 부부가 되었을까 궁금해한다. 아빠는 엄마와의 만남을 들려준다. 엄마가 원래 곰이었으며 자신을 구해줘 결혼했다고 말이다. 아빠가 원하는 결혼에 대한 환상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엄마는 어떨까. 엄마도 아빠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커다란 사슴뿔에 누워있는 모습이나 사슴뿔 위에 그려진 집에 있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아이는 외할머니 집에서 엄마의 어릴 적 사진을 본다. 자신과 꼭 닮은 모습을 보고 또 본다. 엄마의 다리가 뚱뚱해지고, 엄마의 목소리가 커지고 엄마의 얼굴이 빵빵해지며 불곰이 되는 장면은 마치 브루스 박사가 헐크가 되는 과정처럼 유쾌하게 표현되었다. 다시 아침이 되고 엄마는 불곰이 된다. 무서운 표정과 고함에 아빠와 아이들은 후다닥 옷을 입고 후다닥 밥을 먹고 후다닥 집을 나선다.

우리는 가족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불곰이 되었지만 사실 엄마는 사슴뿔 위에서 쉬고 싶다. 아빠는 크고 강한 사슴뿔을 가졌지만, 자신을 구해 줄 불곰 같은 아내를 원한다. 아이는 언제나 웃고 친절한 인형 같은 엄마를 원한다. 저마다 동화 같은 환상적 대상을 원한다.

상담에서 만나는 아빠들이 외롭다고 호소해 올 때가 있다. 아빠 역할을 하려고 결혼을 한 것은 아닌데, 일개미가 되어 희생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가장의 역할이 무겁고 더 잘하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서글픈 마음을 인정하기 싫어 가족 때문이라고 한다. 결혼을 후회하기도 한다. 1+1처럼 사랑과 행복에는 책임감이 따르고, 받고 싶다면 주어야 하는 것을 알지만 자꾸 저울에 올려 비교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 한 사람만의 희생과 노력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의 서로를 향한 사랑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

엄마가 된 지 30년이 넘었다. 아이들에게 다시 엄마를 동물로 상징화해달라고 부탁했다. 큰아이는 문어로, 작은아이는 독수리로 답을 한다. 이유를 물으니 문어는 지능이 높고 다리가 많아 많은 일을 하지만, 마녀가 될 수도 있으며 자유롭지만, 먹물을 뿜기도 한다고 답한다. 독수리는 새끼를 너무 품어주거나 억압하지 않으며 경험을 시키며 성장하는 법을 알려준다고 답한다.

아이들의 이야기에 나의 삶이 들어있다. 엄마로서 어떤 가치관을 갖고 어느 방향으로 가고자 노력하는지 아이들이 알고 있다. 엄마에 대한 환상에서 나와 늘 좋은 엄마일 수 없고 늘 나쁜 엄마일 수도 없는 한 인간으로서 성숙해 가는 과정에 있음을 이해한다. 오늘 불곰이면 어떻고 사자면 어떠한가. 그 자리를 지키고 버텨주는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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