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처럼
철새처럼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1.11.2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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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천변에 새들이 많아졌다. 갈색 몸집에 접은 날개 끝쪽으로 흰색 줄이 날렵한, 검색해보니 흰뺨검둥오리다. 바람이 불면 누런 갈대잎에서 바스락 마른 소리가 들려 황량하던 이곳이 이들의 출현으로 제법 생기 차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니 하는 양이 재미있다. 아직 초록빛이 성성한 풀 섶에 주둥이를 들이밀고 먹이를 찾거나 물 위에 가만히 떠 쉬거나 물가 둔덕에서 선명한 오렌지색 두 다리를 드러내고 햇볕을 쬐거나 하며 따로인 듯 함께인 듯 모여 있다. 좁은 물골에서 서너 마리의 오리가 물살을 따라 줄줄이 헤엄치는 게 꼭 소풍 가는 유치원생들 같아서 귀엽다. 무슨 이유인지 한 놈이 갑자기 날아오른다. 그러자 다른 녀석들도 푸드덕푸드덕 날아오르더니 일사불란하게 하늘을 한 바퀴 선회하고 내려앉는다.

지난달 꿈꾸듯 다녀온 순천만 습지가 떠오른다. 함께 글공부하는 문우와 벼르고 별러서 떠난 둘만의 여행이었다. 순천만의 일몰을 보려고 갈대 사이로 반짝이며 부서지는 빛 가루들을 헤치며 전망대로 가는데, 그때 지금처럼 무리 지어 나는 철새들을 봤었다. 드넓게 펼쳐진 갈대밭 위로 대형을 유지하며 날고 있는 새떼는 마치 액자 속 아름다운 가을 풍경 사진 같았다. 순천만 습지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 유일의 연안 습지로 철새가 많이 찾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곳에서 월동하거나 번식하는 새의 종류가 140여 종이나 되고, 황새, 저어새, 검은머리물떼새 등 국제적인 희귀조류도 많다고 한다. 용산전망대에서 순천만의 S자 곡선 물길 위로 번지는 노을빛을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며 우리가 그 풍경의 일부라도 되는 양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이 아름다운 생명의 땅을 잘 보존해서 후손에게 고스란히 물려줘야지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철새들은 어떻게 그렇게 먼 길을 해마다 다시 찾아오는 걸까? 엄마 새를 따라갔던 경험을 기억하는 것일까? 지구의 자기력을 따라간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태양의 위치를 길라잡이 삼아 이동한다고도 하고, 또 별자리를 좌표로 길을 찾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무엇도 확실하게 밝혀진 건 없지만 어쨌든 철새들은 매번 이 신비로운 여행을 계속해 왔다. 해마다 높은 산과 먼바다를 건너왔다가 또 그렇게 머나먼 길을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철새들은 이 여행길을 미리부터 걱정하진 않는 것 같다. 그저 이 터전에서 사는 동안은 부지런히 찾아 먹고 사랑하며 최선 다해 살아갈 뿐. 그러다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날개를 펼치는 것이다.

호주의 어떤 부족은 아기가 태어나면 “우리는 너를 사랑한다. 새로 시작된 너의 여행을 우리가 도와주마.”라고 환영 인사를 한단다. 그들은 생애를 마감하는 사람에게도 같은 말을 해 준다고 한다. 영원을 사는 영혼의 관점에서 탄생이나 죽음 모두를 새로운 여행의 출발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기에 출발선에서 그들은 아무 두려움이 없다고 한다.

나는 요즘 잘 사는 일 못지않게 잘 죽는 일에도 생각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인생을 마감할 시간과 이후 목적지가 어딘지를 알 수 있다면 오히려 설레며 그날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철새의 이동처럼 그 부족의 이야기도 확인된 바 아닐지 모르지만, 나도 열심히 살다가 때가 되면 여행인 듯 가볍게 떠날 수 있었으면 싶다. 철새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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