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됨을 받아들이면 사람이 가벼워진다
헛됨을 받아들이면 사람이 가벼워진다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1.11.2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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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교수의 문학으로 세상 읽기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우리는 욕구하며 불안해한다. 불같이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불안하다. 그래서 묻는다. 나 사랑해? 응.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라는 답도 틀린 건 아니지만 질문하는 사람이 원하는 답은 `영원히'이다. 그러나 영원히 가는 욕구는 없다. 욕구는 채우면 채울수록 허전해진다. 채워도 영원하지 않다. 욕심의 끝은 사망이니, 헛되다는 걸 알라.

욕구할 때 사람들은 진지해진다. 진지(眞摯)하다는 건 진리(眞)를 잡는다(摯)는 의미이다. 진리는 가만히 있으면 잡히지 않고 애를 써야 잡힌다. 진리를 사랑으로 바꿔보자. 이성 친구와는 긴장감이 생기지 않는다. 어느 순간 허물없이 지내던 친구가 남자로, 여자로 보이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생긴다. 이 묘한 긴장감이 진지함이다. 허물없는, 부담 없는, 거리낌 없는 사이가 사랑으로 바뀌려 할 때, 두 사람 사이에 얼음땡 놀이에서의 얼음의 순간, 곧 진지한 시간이 온다.

진지하게 노력해서 얻지만 그건 영구적이지 않다. 영원할 걸 요구하면 이상해진다. 원래 세상에 태어나서 얻어 갖게 된 것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깨지는 걸 무서워하면 고집이 된다. 내가 어떻게 해서 이룬 성공인데, 어떻게 쟁취한 사랑인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고인 물이 된다. 사랑하게 되는 과정은 미화할 수 있지만 사랑을 지키려는 시도는 애처로워 보인다. 변하면 변하는 대로 가는 게 자연스럽다. 내가 사랑한 니가 그럴 수 있어? 니가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렇게 묻는다면 “사랑은 원래 변하는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다.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집사람이 나에게 묻는다. 나 사랑해? 응. 얼만큼? 하늘만큼 땅만큼. 유치하기 짝이 없다. 젊은 시절, 10대 때 봤던 `초원의 빛'을 본다. 넋을 잃고 청순하고 우아한 나타리 우드를 바라보는데 집사람이 묻는다. 그렇게 좋아? 응. 그럼 가서 나타리 우드랑 살아. 2~3일 밥 얻어먹기 어렵다. `콜드마운틴'에서 니콜 키드먼이 주드 로와 사랑을 나누는 걸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저 여자가 그렇게 예뻐? 아니, 당신보다 못해. 와이프는 좋아한다. 아이들은? 역겨워한다. 최근에 옛날 드라마 순풍산부인과를 보는데 송혜교가 나온다. 우와 원래 저렇게 예뻤나? 역시 넋을 잃고 보고 있는데, 집사람이 묻는다. 저런 여자랑 다시 한 번 사귀어 보고 싶지? 아니, 관심 없어. 그렇지, 나 말고는 관심 없지? 아니, 당신에게도 관심 없어. 맞는다.

왜 때려? 오징어 게임의 도입부에 라캉의 `욕망이론'이라는 책이 나오지? 거기서 말하는 게 뭔지 알아? 사람은 나를 중심으로 무언가를 원하며(욕망하며) 살아가는데, 나를 둘러싼 세계, 우리의 욕망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이자 우리가 조성한 세계라는 거야. 이 세계는 불안한데, 질서와 사회체제의 바탕에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인식할 수도 없는 심연(abyss)이 깔려 있으며, 사람들은 이 심연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야. 심연과 만나면 어떻게 되냐구? 내가 조성한 세계, 나의 욕망계가 무너지는 거지, 허망한 거지. 그럼에도 살아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욕망해, 벗어나기 어려운 관성이기 때문이야. 죽기 살기로 게임을 해서 거금을 얻었는데 기훈(이정재)이 또 게임하러 가는 건, 무언가를 얻으려 하는(욕구하는) 인간의 관성 때문이야.

사랑도 허망한 거야. 사실 이 나이 되면 관심 없어지는 게 맞는 거야. 이 나이에 젊은 시절처럼 사랑을 한다고? 긴장과 스트레스 때문에 온몸이 다 타버려. 그러니까 당신이 철이 안 들었다는 소릴 듣는 거야. 욕망의 헛됨을 모르니까. 마누라 왈, 영감탱이! 그러니까 내가 집에서 철학 못하게 하는 거야.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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